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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내안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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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R Jul 01. 2023

내안의 너 #8

유도분만

큰일을 앞두면 작은 것에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일생 처음으로 겪을 고통과 언제 끝날 지 모르는 과업에 내심 두려움을 안고 입원하던 날은 누리호 2차 발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던 날이었습니다.


남편은 저의 두려움을 알았는지 누리호 발사가 성공적이니 일이 잘 될 거라며 - 저랑 누리호는 이름이 비슷합니다 - 좋은 징조가 아니겠냐고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습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모든 종류의 계시와 징크스, 징조 같은 것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날만큼은 뭐라도 믿고 싶더라고요.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게 새삼 너무 무서웠습니다.


입원은 저녁식사 후에 이루어졌고 짐을 대충 정리한 후 '가족분만실' 이라고 이름붙여진 병실로 안내되었습니다. 따뜻한 이름과는 대조적으로 제가 들어간 병실은 그야말로 살풍경했습니다.


누가 봐도 용도를 알 수 있게끔 생긴 의자는 치과의자보다 훨씬 무서웠고 침대맡의 모니터와, 심박수를 재는 벨트(저 말고 콩의 심박수를 재기 위해 배에 붙이는), 침대 사이즈 대비 굉장히 커 보이는 병실(의료진이 몇 명이나 들어오는 거길래 이렇게 방이 넓은가 싶었습니다), 더위를 많이 타기 일쑤인 막달 산모를 위해 꽤나 시원하게 틀어져 있는 에어컨까지, 저를 벌벌 떨게 할 만한 모든 것들이 모여있었죠.


깜짝 놀랄 정도로 굵은 주삿바늘을 꽂고 촉진제를 투여하는 한편 질정제를 넣었습니다. 막달쯤 되면 온갖 종류의 검사에 익숙해진 후라, 웬만한 일에는 그런가보다 하게 됩니다만 분만보다 내진이 힘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출산 전의 내진과 질정제 삽입은 고통스러웠습니다(저는 자타공인 통증을 잘 버티는 사람임에도 그랬습니다). 아 진짜 살살 좀 하시라구요 ! 하고 소리를 빽 지르고 싶었지만 담당 간호사들에게 저는 지나가는 산모 1일텐데 그런 호소도 하기 힘들었죠. 애 낳는데 그럼 안 아프길 바랬나?


문제는 촉진제를 투여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콩의 심박수가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생겼습니다.


당직의가 들어와 투여를 중지했고, 확인 결과 마지막 검사일 대비 양수량도 지극히 희박해져 있었습니다. 당직의는 일단 촉진제 없이 아침까지 진통을 기다려 보자고 했고, 저는 배에 심박수 측정기를 붙이고 누워있는 게 너무나 불편했을 뿐 아니라 양수부족 + 콩의 탯줄이 한쪽에 몰려 있으니 오른편으로 몸을 돌려선 안됨 + 배가 나와 있으니 정자세로 누울 수 없음 콤보로 왼쪽으로 웅크린 채 밤을 지새야 했습니다.


아침까지 1분도 자지 못하고 밤을 새자 걱정이 됐습니다. 이미 체력이 바닥났는데 진통이 오면 내가 제때 해낼 수 있을까? 입원하기 전까지 열심히 봐 왔던 힘주기 영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물 한모금 먹지 못하고 10시간이 지나 분만은커녕 일어설 힘도 없을 것 같은데 내가 잘못해서 콩이 위험해지지는 않을까?


아침에도 진통이 없어 두 번째로 촉진제를 투여했을 때 콩의 심박수는 엄청나게 내려갔고 저는 호흡기를 낀 채 다시 산소를 주기 위해 열심히 숨을 쉬었습니다. 점점 더 무서워졌죠. 이렇게 하는 게 안전한 건지 확신이 없었어요. 아침이 되어 출근한 담당의는 하루를 더 기다려보거나, 아니면 지금 제왕절개 수술을 해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택한 것은, 수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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