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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록 Nov 21. 2024

햇볕 한 줌, 팬지꽃 한 포기… 그리고 거짓 없는 노래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저녁에 등불을 켜는 것은 어려운 때 더욱 지혜로워야 한다는 뜻이라 믿습니다.(p154)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돌베개


형제들 묘소에 올라 수유꽃 머리에 꽂을 때  
문득 한 사람 없는 것을 알리라.(p167) _왕유      

  

청구회, 추억     

황톳길에 흡사하게 어울리는 똑똑지 못한 옷차림의 여남은 살 꼬마들, 안쓰런 춘궁의 느낌을 주는 그들과 저자와의 안면 트기 및 사귐의 과정은 슬몃 웃음이 납니다. 참으로 순박하고 따뜻한 저자의 심성이 짐작되는 일화들입니다. 어린아이들과의 사귐에 먼저 손 내미는 어른, 그리고 그 어른이 제안한 저금, 독서 등을 넘어서 동네 골목 청소, 약수터까지의 마라톤 등 다채로운 활동을 구상하고 실천하는 아이들. 이런 훈훈한 만남이 중앙정보부의 심문에서 국가 변란을 노리는 폭력과 파괴의 집단으로 억지 주장되는 모습은 그 천박한 정치성으로 참기 힘든 분노를 유발합니다.(마음 따뜻한 지식인이었던 그는 조작된 공안사건의 주역으로 이름을 올리며 20여 년 간의 수형 생활을 거칩니다.)     

  

책, 너무나 흰 손, 그리고 실천적 삶     

저자는 책에서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며 책에 대한 냉정한 시선을 보여줍니다. 책에서 얻은 지식이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그림자이기 쉽다며, 지식은 실천에서 나와 실천으로 돌아가야 참다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지식이란 책 속이나 서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경험과 실천 속에, 그것과의 통일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실천적 일상 없이 다만 책 속에 의식을 파묻고 사는, 요즘 내 삶의 허약함을 들킨 듯하여 마음 한켠이 서늘해지는 구절입니다.     

 

빔으로 쓰임 되는…     

흙을 이겨서 만드는 그릇, 가운데를 비움으로써 생기는 그릇으로서의 쓰임새. '없음'을 '쓰임' 삼는 지혜와 그 여백 있는 생각을 배우고 싶습니다. 가진 것에 뜻을 앗기지 않고, 빈 몸에 넉넉히 고이는 이치를 배워 스스로 당당히 간수할 줄 아는 이, 그런 이의 삶을 들여다보고 흉내 내며 살 수 있었으면 싶습니다. 


(저자의 작품을 인터넷 서점에 검색하는 중에, 작가의 이름을 덮으며 팝업창 하나가 급히 뜹니다. 제목은 '1억 모으기……' 금전 지상주의에 빠진 우리 시대의 자화상 같은 장면에 아찔한 기분마저 듭니다.)

    

중간, 방관의 자리     

'우주는 참여하는 우주', 그 속에서 경험하기,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몸으로 깨우치는 '진실'에 다가서기, 주체적 실천의 믿음직한 원동력으로 나의 시간을 채우기. 중간은 '가공의 자리'이며, 방관이며, 기회주의이며, 다른 형태의 방황일 뿐.   



  

 '너무나 흰 손'이 부끄러운 요즘입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고픈…, 해서 어지러운 세상 속 봉두난발한 우리 조국의 모서리, 그 얇은 옷자락 끝이라도 슬쩍 함께 들고 싶은 시간입니다.      

'슬픔도 힘이 된다', 어린 생들의 이른 주검 앞에 부끄럽게 섰던 크나큰 슬픔이 분노가 되어 촛불을 밝혔던 긴 겨울. 역사는 겨울에 키 크는 것임을, 우리는 우리의 광장에서 배웠습니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잎마다, 발 밑에는 한 줌씩의 따뜻한 땅의 체온을 쌓아두고 있습니다. 나는 이 무성한 잡초 속에 한 포기 키 작은 풀로 서서 몸 기대며 어깨를 짜며 꾸준히 박토(薄土)를 익히고, 나의 언어를 얻고, 나의 방황을 끝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처럼 나도, 우리도,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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