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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록 Nov 20. 2024

꼭 그래야만 했냐

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공을 차기 위해 키커가 달려 나오면, 골키퍼는 무의식적으로 슈팅도 되기 전에 이미 키커가 공을 찰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키커는 침착하게 다른 방향으로 공을 차게 됩니다."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 "골키퍼에게는 한 줄기 지푸라기로 문을 막으려는 것과 똑같아요."  (p120)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페터 한트케, 민음사


1942년 오스트리아 출생의 작가 페터 한트케는 '관객 모독'이라는 연극 제목으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올해도 '관객 모독'은 무대에 올려졌다.)


120쪽 분량의 이 소설은 '블로흐'라는 과거 꽤 유명한 골키퍼였던 주인공이 실직당하고 살인을 저지른 후 국경 마을로 도피해 착각과 불안 속에 생활하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장면 중 하나는 주인공이 공중전화 박스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이다. 그러나 전화의 상대와는 쉽게 통화가 되지 않는다. 연결이 되지 않거나 통화가 이루어진다 해도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에게는 소통의 전망도 없다.

함석문이 닫힌 점포들 중 한 곳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그 점포의 전화번호는 닫힌 함석문 위에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소용없는 짓이야!'하고 블로흐는 생각했다.(p20) 


그의 대화 상대들은 자주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한다. 불통 상태의 주인공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 잦다. (상대와의 대화는 자주 어긋나거나 어느 한 쪽이 알아듣지 못한다. 비유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불통으로 인한 오해를 때론 해명하고 싶어하지만 그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주인공은 살인 후에 이전 여자 친구가 남쪽 국경에서 운영하는 여인숙을 찾아간다.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망은 서서히 좁혀지며 그의 행적을 뒤쫓는다.  


이 소설의 주인공 '요제프 블로흐'의 주된 감정은 '불안'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를 불안하게 한다. 또 그가 겪는 수많은 착각들은 그의 혼란스러운 내면 풍경을 드러낸다. 




한트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쓰'는 당시 문단의 참여문학적 태도를 비판하며 여러 실험적인 작품들을 발표했다.(내용을 무시하고 서술을 우선하는 문학작품들이다.) 그로 이해 다수의 혹평과 소수의 긍정적인 평가(새로움에 대한 찬사)를 받아왔는데, 이 작품은 1970년작으로 그의 서술기법이 실험적인 것에서 전통적인 것으로 돌아선 후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페터 한트케는 201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리나 그의 수상은 많은 논란과 비판에 부딪혔다. (페터 한트케는 코소보 내전 당시 이슬람교를 믿는 알바니아계의 인종 청소를 주도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연방 대통령을 옹호하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연설했다.)




"골키퍼가 공도 없이, 그러나 공을 기다리면서 이리저리 뛰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요."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 (p119)


윤용호는 '작품 해설'에서 말한다. 

독자는, 인간 생존의 기본 요소인 '일'을 빼앗긴 채 경찰에 쫓기는 주인공의 모습을 메마른 심정으로 허전하게 바라보게 된다고. 마치 공 없이 그러나 공을 기다리면서 혼자서 이리 저리 뛰는 골키퍼의 모습을 보듯…. 주인공의 모습에서 인간이 '일'의 지배 아래 존재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새삼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고.



* 아주 개인적인 욱-한 감정을 덧붙이자면, 

사회 조직에서 밀려나고 단절된 주인공은, 대화나 소통의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의 도구로 전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같은 도구 처지인 여자 매표원 '게르다'를 상대로 '앙갚음(살인)'을 하는 건 잔인하고 비겁한 일 아닌가. (실은 우리 시대의 평범한 사람은 누구도 쉽게 그런 앙갚음을 실행할 수 없고, 하지 않으며, 해서도 안 되기에 남성 작가들의 여성 캐릭터에 대한 손쉬운 소설적 소비에 환멸을 느낀다. 거기에 추상적 의미를 부여하는 평론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다. 어쩌면 데이트 폭력(살인)이나 가정 폭력(살인)에 손쉽게 노출되는 여성의 현실을 작가가 무의식 중에 반영한 것일 수도 있겠다.)

-물론 문학적 장치라는 걸 인정합니다만.


인종 청소를 두둔할 정도의 이성에, 자신에게 노벨문학상 수여를 결정한 한림원이 용기있는 태도를 보였다며 기뻐했다는 작가에게, 그의 문학적 실험정신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진지하게 묻고 싶다.   




이런 세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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