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우린 행복해지려고 했어!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 나는 행복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결코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려고 했지. 그래서 바로 번개가 떨어진 거야.(p159)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민음사
이 소설은 다각적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로서의 매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도리스 레싱은 2007년 최고령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그녀의 나이 88세였다.)
그녀는 영국 작가이지만 어린 시절 이란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영향 때문인지 평생 주류에서 벗어난 관찰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고 인식한 작가였다고 한다.
『다섯째 아이』는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직장 파티에서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보수적이고 완고한 신념을 지닌 사람들이었으며 행복한 가정을 최고의 인생 목표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천생연분이었다. 결혼 후 그들은 터울도 없이 연속적으로 아이들을 출산하고, 수입에 걸맞지 않은 큰 집을 무리하게 구입한다. 그들은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구현하는데 조급하게 집착했다. 그들의 행복은 데이비드의 아버지 제임스의 경제력과 해리엇의 어머니 도로시의 헌신적인 가사노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일군 행복이 아니었다. 그래서 손쉽게 허물어진 것은 아닌지.
다섯째 아이 벤은 잉태된 순간부터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난 아이였다. 성장 속도가 남달랐고, 뱃속에서 엄청난 활동량을 보여 해리엇을 극도의 고통에 빠뜨렸다. 태어난 이후에는 특이한 외모와 나이에 걸맞지 않은 괴력과 반사회적 태도를 보이며 모두를 혼돈에 빠뜨렸다.
야생의 본능을 내면에 잠재우고,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사회화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벤은 본능에 충실했고 야생성을 버리지 않았다. 학습되지 않았고 공감이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회화 이전의 인간, 네안데르탈인 같은 아이. 엄마인 해리엇조차 벤에 대해 공포와 혐오의 감정을 갖고 있었고, 누군가 자연스럽게 아이를 처치해 주길 바랄 정도였다.
결국 가족들은 벤을 요양소로 보낸다. 그곳은 아이들을 건사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가족으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이 서서히 죽어가는 곳이다. 아이를 죽게 버려둘 수 없었던 해리엇은 벤을 다시 집으로 데려온다. 벤이 다시 돌아오자 나머지 네 아이들은 학교 기숙사와 친척집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가정적이던 데이비드 역시 벤을 자신의 아이로 인정하지 않으며 밖으로 돌았다. 큰 집에 남은 것은 해리엇과 벤뿐이었다. 벤의 출현으로 완벽하던 가정의 모습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구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려 했던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끝내 불행해지는 모습은, 사회적 가치로 자신의 행복을 가늠하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준다. 또한 행복해지려 했기에 불행을 만난 것이라는 해리엇의 말은, 삶에 대한 오만함을 심판받았다는 의미와 더불어 행복이란 결코 완료될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무엇이며 끝없이 애쓰는 과정일 뿐임을 깨닫게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엄마인 해리엇의 시선으로 읽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데이비드나 다른 가족의 입장에도 공감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벤의 시선을 대입해 보니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였다. 벤은 문명에 적응하지 못하는 원시적인 아이(자연 그대로의 원형성을 간직한)로, 그의 눈에 비친 해리엇과 가족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문명의 세상은 어떻게 보였을까.
문득 아메리카 땅에 상륙한 유럽인들을 바라보는 원주민의 눈이 생각났다. 그들은 그들의 세상에서 그들의 질서를 유지하며 조화롭게 살아왔는데 어느 날 들이닥친 유럽인들은 그들을 야만적인 짐승으로 취급하며 살육하였다. 벤은 현재에 도착한 과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원시적인 벤을 문명인인 그의 가족들은 요양소, 죽음의 구역으로 내몬다. (문명적으로 덜 진화했다는 이유로 아프리카 흑인을 잡아와 전시하며 인간 동물원을 운영했던 서구인들도 떠오른다.)
도리스 레싱은 이 소설을 '1980년대 영국의 상황에 대한 정치적 비유 또는 우화'로 읽지 말도록 당부한다. 이런 당부는, 부족한 모습의 벤이 태어나 가족을 해체시키고 결국 자신의 패거리와 함께 집을 점거하는 모습에서 상위 계급을 몰아내는 무산계급의 투쟁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1980년대 영국의 극심한 노사분규와 파업을 생각할 때)
해리엇의 동생인 사라의 아이 에이미는 다운 증후군이 있었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모습에서 벤과 대조를 이룬다. 이는 에이미는 무해한 아이로 순종적인 모습을 보인 반면, 벤은 전투적이고 순응하지 않는 모습으로 가족들을 불안에 떨게 했기 때문이다. 체제에 불복종하는 개체는 수용하지 않는 기성 체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이야기에서 큰 상징성을 보여주는 것은 '집'과 '식탁'이다. 필요 이상 거대했던 빅토리아풍의 저택은 학교 갱단의 우두머리가 된 벤 일당에게 접수된다. 화목한 가정과 행복의 상징과도 같았던 집은 벤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무참히 짓밟힌다. 집은 외부 세력의 침입을 막고 가족을 보호하는 목적을 잃고, 내부의 벤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적어도 열다섯에서 스무 사람은 넉넉히 앉을 거대한 식탁도 원래의 기능이 퇴색되었다. 그곳에 앉을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이런저런 시선을 대입하여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냥 표면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 읽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보이는 대로 따라 읽다 보면 나도 한 아이의 엄마이기에 아무래도 해리엇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된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의 보살핌이 필요한 것처럼, 온 가족이 벤을 끌어안으며 다른 모습의 행복을 꿈꿀 수도 있었을 텐데. 벤과 관련된 온갖 책임을 엄마인 해리엇에게만 물으며 벤을 죽음의 요양소로 몰아넣은 가족과 친척들의 모습이 아쉽게 느껴진다. 벤의 육아와 교육은 쉽지 않은 일이기에 한 사람의 ‘모성애’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해리엇이 고통을 같이 짊어질 누군가를 간절히 원했던 것처럼 모두의 노력이 함께 필요했던 것이라 여겨진다.
어릴 적 벤은 형제들을 관찰하고 그들을 따라 하려 노력했다. 이야기의 전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지능은 없었지만 벤은 형제들이 텔레비전을 보고 웃을 때 자신도 그들을 따라 웃었다. 그에게도 동질화의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리엇은 벤의 무리가 사회적 규율을 거스르는 범죄를 저지르며 돌아다니는 거라 판단하지만 벤은 폭동의 현장에서도 폭력을 행사하는 쪽이 아닌 지켜보는 위치에 있었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을 뿐 어쩌면 벤도 가족과 닮은 모습으로 함께하길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그게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존재의 가치는 각자의 모양으로 빛난다. 각자의 모양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함께 애쓰는 과정 자체가 또 다른 행복의 모습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