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수용소 체제를 향해 가게 된다. 이것은 막기 힘든 과정이다. (p285)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돌베개
어릴 적의 나는 순응적인 아이였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말대답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하라는 건 다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나도 하지 않았다. 좌측통행, 실내정숙 등의 의례적인 학교 규칙도 완벽하게 지켰다. 지금도 신호등 없는 길은 잘 건너지 못하고, 손에 든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못해 집까지 들고 오곤 한다.
고등학교 때 교생 실습을 나온 학교 선배가 있었다. 사회비판적인 시각이 강한 사람이었고, 당연하게 여겼던 많은 일들이 실은 대단히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일이었음을 알게 해 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대학생이었던 언니가 빌려온 책을 밤새워 읽으며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되었다.
순응하는 보통의 사람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위협에 대해, 그리고 의문을 갖지 않는 삶의 위험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질문이 없다는 건 자신만의 생각이 없다는 것. 기존 체제가 권력의 편의를 위해 구축한 규칙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건 자신의 삶을 돌보지 않는 태도라는 것을 알았다. 고등학생 때 처음 읽은 『1984』는 내가 체제에 의해 감시, 통제받는 존재라는 자각과 거대한 정치 체제가 어떻게 인권을 유린하는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가장 무겁게 다가온 글귀가 있다.
비인간적인 명령을 부지런히 수행한 사람들을 포함한 이런 추종자들은 타고난 고문 기술자이거나 괴물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괴물들은 존재하지만 그 수는 너무 적어서 우리에게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일반적인 사람들, 아무런 의문 없이 믿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기술자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p303)
질문하지 않고 무턱대고 복종하는 인간이 나치 체제 하에서 어떤 비극적 세상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아픈 지적이다. 생각하며 세상을 주시하는 일, 합리적인 의문을 품는 일이 우리의 일상에서 훈련되어야 하는 이유다.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의 유대인으로 반파시즘 저항 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 프리모 레비는 '노동을 통한 유대인 절멸' 정책이 실행되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증인으로서 지옥의 나날을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의 개인적인 체험록인 동시에 '인간 그 자체의 위기'를 생생히 기록한 인간 전반에 대한 증언록이다.
수백만 명의 집단학살이 어떻게 유럽 한복판에서 자행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레비는 이렇게 답한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p276)
즉,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잔인한 반유대주의로 뭉쳐 알면서도 모르는 척 고의적인 태만함으로 나치의 공범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나치의 수용소는 사고가 아니라는 것, 단순히 예기치 못한 우발적인 역사적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끔찍한 교훈이 되는 것이라고.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든 자유와 평등이 침해받는 장면을 수용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것으로 커져 결국 우리 스스로를 구속하게 되리란 것을 말한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식민지배, 동족상잔의 비극, 민족의 분단, 군정에 의한 폭압 등 잔혹한 폭력이 잇대어진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은 이제 모두 지나갔다고 말하지 말자. 무엇 하나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채 그 폭력의 잔재 위에 우리는 서 있다. 1980년 비상계엄령의 유령이 2024년 현재에 버젓이 나타나 무장 계엄군이 국회의 창문을 깨고 강제 진입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1987년 4월 11일 프리모 레비는 자살했다. 프리모 레비의 묘에는 '174517'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팔에 문신으로 새겨진 수인번호다. '아우슈비츠에서 파괴된 인간의 척도를 재건하는 일'에 몰두했던 그의 자살은 남은 이들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