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녹턴』 중 <말번힐스>
당신 작품은 대부분 무엇이 성공한 삶이며 무엇이 실패한 삶인가, 무엇이 좋은 삶이고 무엇이 허비된 삶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당신이 만들어 낸 인물들은 대체적으로 어떤 깨달음을 얻는데, 보통 자기 삶이 실패했거나 허비되었다는 깨달음이죠. _『작가라는 사람』중에서
* '엘리너 와크텔'이 '가즈오 이시구로'와의 인터뷰 중 한 말
『녹턴』 중 <말번힐스> , 가즈오 이시구로, 민음사
세상을 보는 두 개의 시선
소냐와 틸로 부부는 위대한 작곡가들로부터 영감을 얻는 전문 음악인이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호텔이나 식당, 결혼식이나 파티에서 청중들이 원하는 음악을 연주하는 일을 한다. 스위스인인 소냐와 틸로 부부는 모처럼의 휴가를 얻어 '엘가'의 고향인 영국에 왔지만 소냐는 사소한 일에도 자꾸 화가 난다.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음악을 연주할 기회가 많지 않은 현실과, 음악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닌 복장과 같은 부차적인 것들로 제재를 받는 상황과, 하나뿐인 아들과의 소원한 관계 등도 불만이다. 반면 틸로는 유럽을 돌아다니며 연주하는 생활에 만족하며 자신이 선택받은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화자인 '나'는 런던 음악계에서 인정받길 원하지만 지지부진한 채 누나의 카페가 있는 말번힐스로 온다. 누나의 카페는 언덕배기에 위치한 오래된 건물로 여름 한 철만 문을 여는 곳이다. 누나는 화자에게 급료 없이 숙식만 제공하며 카페가 바쁜 시간에는 도움을 요청한다. 화자는 최소한으로 일손을 보태며 카페의 번잡함을 피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자 한다. 카페가 문을 연 후로 가장 바빴던 날, 누나는 기뻐한 반면 매형은 그 바쁜 시간에 도움을 주지 않은 화자에 대한 불만을 우선한다.
음악_ 삶에 대한 믿음의 형태
소냐는 화자가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 활짝 웃음 짓는다. 카페에서 음식이 늦게 나왔다고 고약하게 굴던 것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어느 것에도 의견 일치를 볼 수 없었던 소냐와 틸로 부부는 음악 앞에서는 친밀하고 편안하게 서로를 밀착시킨다.
"하지만 우리가 음악을 연주하는 건 다른 무엇보다도 음악을 믿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당신도 그렇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어요." 소냐가 말했다.
"더 이상 내 음악을 믿지 않게 된다면 난 음악을 그만둘 겁니다."내가 대답했다.(p124)
어쩌면 등장인물들의 음악에 대한 말들은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었던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음악에 대한 믿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음악'이란 낱말 대신 '삶'이란 말을 대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타인들은 나에게 어떤 것이 진정으로 '성공적인' 시간이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파악하지 못하지만 스스로의 삶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관계에서의 실패, 재능에서의 실패 그러나 품위 있게
이 작품은 실패에 관한 것이지만, 여기서 다루어지는 실패에는 품격이 있고, 그런 품격 있는 실패를 통해 인간 조건이 품위를 획득한다.
_ '마거릿 드래블'의 『녹턴』에 대한 말 중에서
런던의 음악계에 편입되지 못한 화자의 모습과, 하고 싶은 음악 대신 청중들의 요구에 맞춘 곡을 연주해야 하는 소냐 부부의 모습, 그리고 그레이트말번이나 일급 도로변이 아닌 그냥 언덕에 위치한 오래된 건물의 카페를 운영하는 매기 부부 등,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중심으로부터 거리감이 있는 모습들이다. '엘리너 와크텔'은 이시구로 소설의 특징으로 '거리감'을 들었다. 이시구로는, 가치관이 보편적인 절대성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이민가정이라는 특수성을 통해 획득했다. 주류에 편입된 행복이 보편적 가치인 시대에 말번힐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루저의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의 믿음을 지키려 노력한다. 다만 그 믿음은 때때로 흔들리며 허약함을 보인다. 젊었을 때는 어떤 것에도 화를 내지 않았지만 이제는 많은 것들에 화가 난다는 소냐의 말은, 자신의 삶에서 실패의 현실을 목도하는 일의 버거움 탓일지 모르겠다.
소냐와 틸로는 그들의 부부관계, 자식과의 관계에서 실패의 양상을 보이고 직업적 성취도 미미하지만 음악에 대한 믿음만은 버리지 않았다. 화자인 '나'도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고, 누나와 매형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음악과 함께 한다. '부와 명예'를 찾지 못하고 목표를 성취하지 못했다 해도 우리의 일상이 전체적으로 보아 '흥미진진한 막간'과도 같은 것일 수 있다고, 인생은 장기전이며 실패에도 기품이 있을 수 있다고, 작가는 그렇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단순하게 가즈오 이시구로의 음악에 대한 사랑을 말한 작품일 수도 있겠다. 이시구로는 '기타리스트와 가수로 실패했기 때문에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인생의 황혼기에, 그들의 '음악'처럼 나는 무엇으로 실패를 상쇄할 기품을 유지할 수 있을지….
* 『녹턴』에는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