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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록 Dec 06. 2024

'다산'의 두 하늘

정민  『파란』/ 박석무  『다산 정약용 평전』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가까이 자리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고향 마을.(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 낮은 산이 집 뒤에 자리한, 볕이 환한 집. 가까운 강물을 따라 산책길이 놓이고 봄이면 꽃이 흐드러질 공원도 아름답다. 따사롭게 햇볕 내리는 날, 강 둘레길을 천천히 걸어봄직하다.  



 '여유당'




한 하늘 _ 천주교

정약용을 평생 옭아맸던 천주교의 굴레는 운명인 듯싶다. 그의 가족을 포함한 주변인 모두가 천주교의 영향권 내에 있었던 까닭에 그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며, 그런 배경을 떠나서도 그 스스로 천주교의 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끌림이 있었던 것 같다. 정조가 죽고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정약용은 배교 후 철저한 자기 검열로 천주교와의 거리 두기를 통해 목숨을 부지했다.


정민 교수는 정약용이 표면적인 배교를 넘어 마음으로는 믿음을 간직했을 것으로 판단했고, 박석무 교수는 정약용이 온전히 신앙을 버렸다고 확신한다. 박석무 교수는 시파 중 특히 신서파(서학 옹호 세력)를 일망타진하려던 반대파들이 끝내 정약용을 죽일 수 없었던 것은 그가 배교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파란』 1(정민, 천년의상상)

다산이 천주교 신자였던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다만 배교한 뒤 만년에 다시 참회해 신자의 본분으로 돌아왔는지 여부로 의견이 엇갈린다. 천주교 쪽의 가장 신뢰할 만한 문서인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는 다산이 만년에 참회의 생활을 계속하면서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했고, 세상을 뜨기 직전 종부성사까지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p147)


『다산 정약용 평전』 (박석무, 민음사)

다산 정약용의 신유년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대로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명확한 재판의 결과가 나왔음에도 그가 그처럼 혹독한 탄압으로 18년의 유배 생활을 했던 사실로 보면, 권력 싸움의 패악상을 반영하며 진보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지식인들을 체제 수호라는 이름으로 탄압한 사건이기도 했다. 서교(西敎)와 서학(西學)을 분명히 식별하여 서교에서 진즉 빠져나와 서양의 과학 사상인 서학에 관심을 기울였을 뿐인 다산을 죽이려 했던 것은 분명한 정치적 탄압이었다. (p304)




두 하늘 _ 정조

정민 교수는 다산의 두 하늘이 천주와 정조였다고 말한다. 정약용의 삶에 그 둘은 떼어낼 수 없는 관계였다. 박석무 교수는 정조와 정약용의 관계를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의 만남’으로 표현했다.


『파란』1(정민, 천년의상상)

정조가 '문체가 훌륭하다'며 그 읽는 소리에 가락을 맞추실 때 다산의 한 세상이 활짝 열렸다. '곧 부를 테니 다시 만나자'는 말씀 끝에 홀연 세상을 뜨면서 다산의 다른 한 세상의 문이 꽝 하고 닫혔다. 정조와 함께한 시간이 18년, 그 뒤 강진 유배 기간이 또 18년, 해배 후 세상 뜰 때까지가 다시 18년이었다.
빛은 한꺼번에 몰려들어 왔다가 단번에 닫힌 뒤, 깜깜해진 채로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p97)


『다산 정약용 평전』 (박석무, 민음사)

정조의 죽음은 문자 그대로 다산에게는 하늘이 무너짐이었다. 다산보다 열 살 위이던 정조가 겨우 49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그렇게 쉽게 떠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참으로 뜻밖의 불행이었다.(p277)

18년에 걸친 정조와 다산의 만남은 역사 창조의 추진력이었다. 다산은 정조를 온갖 지혜를 다 바쳐 보좌하였고, 문물제도를 이룩하는 기술 관료로서도 큰 역할을 해냈다. 또한 정조는 다산의 지혜와 능력을 백분 인정하고 그가 일할 터전을 제공해 주었다.(p286)


정조와 정약용의 관계는 이상을 같이 하는 정치적 동지이자 학문과 철학을 나눌 수 있는 벗이었다. 정조는 군주의 힘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릴 때마다 정약용을 구해줬고, 정약용은 정조가 기획한 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힘써 조력하는 믿음직한 신하였다. 정조가 49세의 이른 나이에 급사하지 않았더라면 정약용의 일생도, 조선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시냇가 헌 집 한 채 뚝배기 같고

북풍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앙상하네


묵은 재에 눈이 덮여 부엌은 차디차고

체눈처럼 뚫린 벽에 별빛이 비쳐 드네


집 안에 있는 물건 쓸쓸하기 짝이 없어

모조리 팔아도 칠팔 푼이 안 되겠네


개꼬리 같은 조이삭 세 줄기와

닭창자같이 비틀어진 고추 한 꿰미


깨진 항아리 새는 곳은 헝겊으로 때웠으며

무너 앉은 선반대는 새끼줄로 얽었도다


오호라 이런 집이 천지에 가득한데

구중궁궐 깊고 멀어 어찌 다 살펴보랴


『다산시 연구』  (송재소, 창비)


(* 참담한 지경에 이른 조선 백성들의 가난한 실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정약용의 시다. 그는 곡식의 생산을 담당하는 농민들이 생산물로부터 소외되어 굶주리는 모순을 개혁하려는 의지를 지닌 사람이었다. 민중의 배고픔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생생한 묘사가 가능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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