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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록 Dec 02. 2024

서로의 마음에 불 켜기

김혜진  『경청』

생명을 지니고 태어난 것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내야 할 숙명이 있다.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p106)


『경청』 , 김혜진, 민음사


『경청』은, 유능한 상담사로 인정받던 임해수가 하나의 사건으로 철저히 무너진 상황에서 다시 자신을 추스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보여줍니다. 임해수의 마음이 어떤 풍랑을 겪고 어떻게 떠돌다 어느 자리로 흘러가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이 글은, 어른의 성장기라 부를 수도 있을 듯합니다. 자신에 대한 가혹한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임해수가 쓴 편지글로 소설은 시작됩니다. 각각 다른 수신인에게 쓴 여러 편의 편지글이 배치된 소설의 전반부에는, 정제되지 않은 주인공의 울분과 비통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임해수의 분노와 슬픔이 전적으로 공감되었던 건, 그런 마음결이 내게도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경청』에는 주인공이 쓴 열아홉 통의 편지가 나옵니다. 그중 가장 많은 편지는 친구 주현에게 쓴 것입니다. 주현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쓴 주인공의 심정이 짐작되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가까운 이가 준 상처가 가장 아프고, 또 가까운 이에게 가장 먼저 이해받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까요. 내 상황을 알아달라는 절절한 간청과 힘들다는 호소로 범벅된 초기의 자기중심적인 편지는,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주현을 향한 사과와 고마움을 전하는 글들로 서서히 변화합니다. 조금씩 느리게 변화하는 주인공의 마음이 때로는 안타깝고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허투루 문장을 흘려 읽지 못했습니다. 


임해수가 날마다 쓴 편지를 날마다 찢어버린 것은 이처럼 일방적인 항의의 편지였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소통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그래서 관계를 복구할 가능성이 없는 그런 편지들. 이야기가 진행되면 임해수는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습니다. 날마다 쓰고 찢던 편지를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그녀가 격렬한 마음의 부대낌에서 어느 정도 놓여났으며, 어쩌면 자신이 일방적인 피해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깨달음에 다다랐다는 의미 아닐까요. 임해수를 전쟁터 같은 마음에서 구출한 것이, 이전의 그녀라면 눈길 주지 않았을 작은 존재들(아이와 고양이)이라는 사실은 뭉클한 감동을 줍니다.  


『경청』에 관한 서평을 읽다가 '캔슬 컬처'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관계를 끊는다는 의미의 '손절'로 해석되는 말이었습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거나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배제하고 외면하는 문화라고 설명되어 있더군요. 손절의 대상과는 마주하는 일도, 대화하는 일도 없겠지요. 그래서 서로가 잘못 알고 있거나 곡해한 부분을 바로잡을 기회도 전혀 없을 것이고요. 나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나 엉뚱한 오해를 영원히 바로잡을 기회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합니다. 상대가 이미 나를 '손절'해 버렸다면, 나를 향한 귀를 굳게 닫아버렸다면, 나는 어떻게 온전한 나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 상대가 아는 나와 본연의 내가 완전히 다른 채로, 그렇게 이지러진 모습 그대로 박제된 채 관계는 끝이 나버리는 거겠지요. 임해수가 겪는 사건을 통해 우리는 '캔슬 컬처'의 무시무시한 힘을, 단편적인 증거로 쉽고 빠르게 누군가를 판단하는 일이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오는지를 똑똑히 목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마디의 말도 한 줄의 글도 쉬울 수 없다는 무서운 자각에 이르게 됩니다.   


『경청』에는 임해수와 관계를 맺는 중요한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같은 동네에 사는 초등학생 황세이입니다. 황세이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피구라는 운동경기를 통해 또래에게 혹독하게 배척당하는 황세이의 모습은 임해수의 현실과 닮아있습니다. 임해수는 세이의 현재 상황을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함부로 개입하거나 충고하지 않습니다.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개입이나 충고가 얼마나 공허한지 충분히 경험한 탓입니다. 자신의 상황과 유사한 황세이의 처지를 한 발자국 떨어져 지켜보며, 임해수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연습을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임해수가 세이와의 본격적인 상담을 위해 마주 앉는 마지막 장면은 퍽 의미심장합니다. 그녀가 자신을 객관화하는 작업을 통해 마음의 격랑을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상담사라는 본연의 역할을 다시 감당해 보겠다는 각성을 드러내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청』에는 황세이보다 그녀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여지는 길고양이 순무가 등장합니다. 순무는 척박한 삶의 현장에서 지독하게 상처 입은 몸으로도 자존심을 지키려 애씁니다. 순무를 향한 관심과 염려가 자신에 대한 연민일 수 있다는 자각을 하면서도, 임해수는 순무를 향하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순무의 모습에 투영된 자신의 얼굴을 외면하기 어려웠던 것이겠지요. 순무를 구조하기 위한 과정에서 팔에 상처를 입고 포기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순무에게로 다시 돌아옵니다. 임해수는 순무를 구조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주저하고 회피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본모습을 직시하고 세상과 직면하는 한층 성숙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글이 어른의 성장기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처음에는 '경청'이라는 단순 명료한 제목이 좀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소설의 제목으로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강렬한 것이 필요하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는 '경청' 이외의 다른 제목은 적합하지 않았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경청'이란, 단순히 상대의 말을 듣는 행위가 아니라 상대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낱말이라고 합니다. 이 글 속의 대중은 '예의도 자비도 없는' '무차별적 신상 공격'을 감행하는 자들입니다. 익숙한 행태의 무리 뒷줄쯤에 어쩌면 내 얼굴도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오소소 소름이 돋습니다. 나도 어쩌면 그들처럼 '헤아림과 공감' '위로와 포용' 대신 정의로움과 공정함을 내세우며, 익명의 그늘에서 누군가의 심장에 칼금을 그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힘겨운 시간 속에서는 누군가의 '경청'이 간절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누군가도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순간순간에 마음의 귀를 열어야 하는 이유겠지요.


임해수는 자신이 이전의 여름을 풍경으로만 흘려보냈다면 올해는 '여름의 한가운데를 맨몸으로 통과했다'고 느낍니다. 시간의 무게로 고통의 모서리를 갈아낸 자만의 깨달음이겠지요. 그리고 그녀는 지금의 시간을 지나 그다음의 시간으로 나아갈 의무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서랍과 책장을 정리하며 죽어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 것들을 과감히 버리는 행위에서, 과거의 완고한 자신을 깨뜨리고 세상과 직면하고자 하는 임해수의 변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임해수의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 중 하나는, 직장 대표에게 보내는 『경청』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직장 대표에게 쓴 이전의 편지가 분노의 감정을 담은 의문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마지막 편지는 직장 생활 중 상대가 자신에게 베풀었던 온정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내용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일방적인 피해자 의식을 벗고 '그다음의 시간'으로 나아가는 임해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격렬한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 치유의 단계에 들어선 순무의 모습과 함께 읽는 이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줍니다.  


가장 여운이 남았던 장면은,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듣기만 할 수 있느냐는 황세이의 질문에 임해수가 그럴 수 있다고 답한 후, 상대가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대화에 몰입하는 부분입니다. 

대화는 조금씩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불신과 두려움 같은 것을 밀어내며 스스로 반경을 넓힌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녀는 아이의 마음속에 불이 켜진 것 같다고 느낀다. 두 사람 모두 불이 켜진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느낀다.(p182)  

나는 이 장면에 밑줄을 긋고 여러 번 읽었습니다.  '경청'이란 바로 이런 것,  '서로의 마음에 불을 켜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하면서요. 


김혜진 작가의 신춘문예 당선작인 「치킨 런」을 읽은 이후 십이 년이 지났습니다. 노숙자를 다룬 소설 「중앙역」은, 치열한 취재로 이루어냈을 묘사의 디테일이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불과 나의 자서전』이나 『딸에 대하여』는 작가가 추구해 온 쓰기의 세계가 웅숭깊어졌음을 보여줬습니다. 이토록 단단한 세계를 지어 올린 김혜진 작가의 능력과 노고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쓰기'와 '읽기'의 세상에서 온전히 공감할 수 있는 작품과의 만남은 귀한 체험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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