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이야기_눈 내린 겨울 아침
* 젊은 시절의 엄마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엄마는 병약한 할머니가 되어 자신의 지난 시간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지금껏 엄마 곁에 머물 시간이 많지 않았던 나는, 이제라도 엄마의 옛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엄마의 이야기>
"눈이 자주 왔다.
깊은 산을 채우며 눈은 쌓였다.
어린 다리가 푹푹 빠졌다.
아버지는 고무래를 밀어 길을 텄다.
아버지의 입으로는 저녁 굴뚝같은 연기가 솟고 상기된 얼굴을 채우며 땀이 돋았다.
눈 위로 툭툭 듣는 아버지의 땀방울을 보며 남매는 한 발짝씩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느린 걸음이 지루해진 오빠는 쌓인 눈 속으로 푹푹 발을 집어넣으며 앞서 나갔다.
아버지는 "발 젖는다. 발 젖으면 학교 가서 발 시렵다." 고 소리쳤다.
오빠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을 적시며 지루함을 죽였다.
나는 굽힌 아버지의 등과 쌓인 눈 속으로 사라졌다 빠져나오는 오빠의 발을 번갈아 보며 천천히 걸음을 뗐다."
폭염일이 평년의 두 배, 열대야일은 세 배에 육박한다는 뉴스를 들으며 밤늦도록 에어컨을 돌리던 어느 날, 엄마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기도 하고 또 에어컨을 틀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죄책감에('에어컨이 지구 환경에 미치는 영향' 따위 글들을 가끔씩 검색해서 읽어본다) 잘 켜지 않는 편인데, 올여름은 참기 힘들었다. 여름은 늘 더웠지만(그래서 좋아하는 계절이다. 물론 겨울은 추워서 좋아한다) 올해는 유난했다.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면 한겨울 눈 내리는 장면을 종종 떠올린다.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가끔 떠올리는 장면 중 하나다. 사방에서 목 굵은 나무들이 밤새 폭설로 무거워진 머리채를 흔들어대며 철푸덕철푸덕 눈다발을 떨구는 아침. 결 고운 햇발이 눈더미 위에 소복이 내려앉아 눈이 시리게 빛나는 하얀 풍경.
엄마의 고향집은 전쟁 발발 소식도 몰랐을 만큼 첩첩산중이었다. 주변에 인가 한 채 없고 고개를 하나 넘어야만 사람 구경을 할 수 있던 외딴집. 앞뒤옆으로 빼곡히 들어선 나무들이 이웃이었다. 낱낱의 나무 사이를 메꾸듯 함박눈이 푸지게 쏟아진 아침이면 한 걸음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터주는 길을 따라 학교로 향하던 이른 시각, 천지간 눈과 눈과 눈뿐이던 세상. 엄마는 그 겨울 아침, 땀을 뚝뚝 떨구며 길을 터주던 젊은 할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엄마는 그 장면 속 할아버지를 향해 혼잣소리를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