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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록 Sep 12. 2024

도착한 너의 세계(2)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 2(37 ~66쪽)


"그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존재했다는 사실이 신기한 일이다"(p63)


이곳은 전혀 다른 '생물'의 세계이다. 생명 활동의 기본 매체는 칩이다. 로봇의 세계에서 생명의 근원은 공장이며, 먼지와 재, 이산화탄소, 기름과 폐기물은 그들을 살리는 아름다운 자연이다. 하찮은 농담 같은 이 전제가 그들의 진지한 현실이다.


뜨거워진 지구에서 인간이 멸절되는 사이, 인간이 만든 로봇은 진화를 거듭해 그들만의 세계를 건설했다. 인간의 흔적은 아득한 고대문명 속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로만 남았다. 나는, 인간은, 존재의 기억조차 지워진 채 먼 고대의 전설 속에 한 톨 먼지로 누워있다. 공룡이 멸종 원인과 관련한 잡다한 추측을 달고 사람들 곁을 떠돌았듯, 원인이 불명확한 인간 멸절의 현상은 한 조각 먼 신화로 로봇 세계의 고문서 속에 놓인 것이다.   


당신도, 나도, 아직은 먼지 속에 길게 잠들어 있다.


식물의 씨앗으로 유기생명체를 복원하려는 몇몇 로봇들의 고군분투는 '중세 동북아시아 수도승 의복 무늬학'의 비인기 기록을 깬 '유기생물학'에서 시작된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무생물인 나는 그들의 분투에 숙연해진다. 자신이 발 디딘 땅을 의심하며 '아니오'의 팻말을 드는 독특한 소수가 이곳 로봇 세계에도 자생하는구나. 이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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