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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록 4시간전

세상의 모든 처음은 어렵다

황보윤 소설  『광암 이벽』

"자네와 나도 뜨거운 불길을 품고 있다. 나는 이미 타오를 준비를 마쳤다."(p18)


광암 이벽』, 황보윤, 바오로딸, 2023     

      

우선, 문장이 참 맑다. 군더더기 없이 정곡을 뚫지만 거칠지 않고 단정하다. 그 어렵다는 신춘문예에 두 차례나 당선된 이력의 작가답게 완숙의 경지가 느껴지는 문장이다. 잘 다듬어져 걸리는 데 없는 문장 덕에 책장이 미끄러지듯 넘어간다. 하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은 선교사 없이 자생한 조선 천주교의 태동과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배경으로, 최초로 학문을 종교로 받아들인 조선 사람 이벽의 생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은 이벽의 종교인으로서의 성장과 순교의 역사를 보여주는 소설이면서 동시에 인간 이벽을 실재감 있게 드러내는 풍부한 이야기성을 포함하고 있다. 스승과 벗들을 통해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자세, 아내와 학문으로 교통하는 모습, 하인과의 인간적인 관계 맺음 등, 인간 이벽의 일상과 성품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다른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조선 선비들의 토론 모습을 재현한 장면이다. 녹암과의 열흘 간의 강학 모습, 이가환과의 천주교에 대한 토론 장면 등은 깊은 공부가 없이는 재현할 수 없는 내용이다. 작가의 내공이 느껴지는 부분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에 관한 질문과 탐구가 가득하다.   


그리고 정약용에 대한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표현한 부분이나 이벽이 방에 갇혀 죽어가는 장면 등은 작가의 상상의 깊이에 감탄하게 만든다. 인간 본성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불러낸 장면들이다.


"이벽이 이물에 서서 설교를 시작했다. 삐걱삐걱 노 젓는 소리, 햇빛에 반짝이는 윤슬, 갓 테에 날아와 앉는 은사시나무 꽃가루, 버짐처럼 피어난 산 벚꽃, 이름 모를 새소리, 시름없이 떠가는 흰 구름…. 이벽이 허공으로 가볍게 떠올랐다. 두 형과 뱃전에 앉은 이들도 하늘로 들어 올려졌다. 구름 사이로, 빛으로 꽉 찬 문이 열렸다."(p318) 

이벽의 선상 설교로 천주교에 빠져들게 된 정약용이, 배교와 유배의 긴 시간을 거쳐 이벽의 무덤 앞에 선다. 이 소설은, 이벽의 무덤 앞에 선 정약용이 순교한 이들의 승천 환영을 보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다 읽은 후 서문으로 돌아와 이벽의 유서를 다시 한번 읽는다. 처음 읽을 때보다 한층 깊은 울림이 가슴을 채운다.  ‘시원하고 올곧으며, 기쁘다가 문득 슬프다.’는 김탁환 작가의 추천사가 문장 그대로 이해된다.


첨부된 다양한 참고 자료 목록은, 존재했으나 체험할 길 없는 그 시간 속 공간을 찾아가 긴 시간 고뇌하며 한 문장 한 문장을 지었을 작가의 고단함을 짐작하게 한다.   


*각 장의 단아한 제목들은 맛깔난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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