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시의 힘』
밤은 길고, 길은 멀다.
어둠은 짙고 길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둠 속에서 시가 무슨 힘이 있느냐고.
『시의 힘』, 서경식, 현암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참기 힘든 소리가 일상으로 울리던 시절에도 누군가는 시를 썼고, 누군가는 시를 읽었다.
'숨죽여 흐느끼며/남몰래/타는 목마름으로' 그렇게 쓰고, 또 그렇게 읽었다.
김지하의 시가 교과서에 실리고, 아이들은 '타는 목마름으로'를 변형한 랩을 흥얼거린다. 그 시절 민주화 운동 주역들은 한 때의 이상을 버리고 뒤틀린 보수의 일원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그 시절의 고통은 지나갔을까.
독재정치의 폭력적 외형은 벗었을지 모르나 인간 존엄에 대한 부정과 냉소가 또 다른 폭력으로 만연한 시대. 권력의 무자비함은 엄연하고 부정의가 득세한다. 사회와 정치 현상에 대한 관심은 고단한 일상에 막혀 버렸다. 청년이 좌절하고 약자는 견딜 수 없어 스스로 삶을 놓는다. 사위가 어둡다.
'시인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는 산소 결핍 징후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침묵할 때에도 침묵해서는 안 되는 사람' _ 정희성
이 시대 자욱한 어둠 속에서 누가 쉽게 시인을 자처할 수 있을까.
저자 서경식은 일본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재일조선인이라는 마이너리티 입장에서 지배층에 대항적 이야기를 제시하는 것이 본인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일본땅이 삶의 현장인 그에게 조국이란 더 이상 특정 영토를 가리키는 지리적 의미가 아니다. 그에게 '조국'이란, 정의에 관해 묻고 진실을 말하려고 싸우는 삶의 방식이며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저자는 '글을 쓴다'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역할을 완수하고 이 과제를 공유하는 이들과 연대하고자 한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_ 루쉰
길이 없다. 그래도 걷는다.
시인은 희망이 아니라 시대의 어둠을 말하고 절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둠과 절망의 시는 사람을 움직인다. 시의 어둠과 절망은 사람의 희망으로 변환된다. 그것이 시의 힘이다. 그래서 시인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존재다. (독재정권 시절 우리에게도 어둠과 절망의 시를 쓰는 시인이 있었고, 누군가는 그 시를 숨겨 읽으며 희망의 기미를 찾았다.)
'인간은 타자의 고난에 상상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자본주의의 보편성 속에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노래하는 것이 시인의 소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문명의 야만성이 다양하게 발현되는 이때, 지금 이 시대가 시인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요구하고 있다.
길은 없다. 그러나 걸어가면 길이 된다. 많은 이가 어둠 속에서도 걸음을 놓지 못하는 이유다. 아직도 '처절하게' 시를 쓰고, '숨 막힐 듯이' 시를 읽는 이들의 발밑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길이 닦이고 있음을 믿는다.
오늘도 당도할 시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