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로부터 '살구'로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by 장소록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언제나 기다림이 아니라, 내 쪽에서 먼저 내딛는 한 걸음이다"(p380)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 반비


살구 더미는 침실 바닥 방수포 위에서 썩어가고 있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거의 아무것도 주지 않았던 어머니로부터 온 것이다. 어머니는 딸의 외모와 능력 모두를 시기했고, 때때로 딸을 향해 분노했다. 그 어머니는 지금 알츠하이머병 환자다.


저자 리베카 솔닛은 어머니의 살구나무에서 따온 엄청난 양의 살구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장 가까운 가족인 어머니와 소통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우울은 그녀를 책과 소통하게 한다.


"작가가 된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책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마치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가듯 그 안으로 사라졌다. 나를 놀라게 했고, 지금까지도 놀라게 하는 것은 이야기의 숲과 고독 그 너머에 건너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건너편으로 나가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p96)


저자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완벽한 평화가 있는 장소',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를 발견한다. 그것은 도서관이었다. 그녀는 찬양한다. '도서관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성지이며 세상을 통치하는 지휘소'라고.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을 건너온 지금, 그녀는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말한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라고. 어머니와 소통할 수 없었던 소녀는, 읽기와 쓰기를 통해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소통하게 된다.


이 책의 차례는 독특하다. 첫 장과 마지막 장의 제목은 살구이다. 살구로부터 시작해서 살구로 끝이 나는 구조다. 살구로 시작한 이후, 다음 장부터는 앞쪽과 뒤쪽의 제목이 짝을 이뤄 반복된다. 다만 차례의 가운데쯤 반복되지 않는 제목들이 있다. '감다-매듭-풀다' 의미심장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반복되는 같은 제목의 장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 모습인지를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는 읽기가 될 것이다.


IMG_4049.jpg 『멀고도 가까운』_ 차례


저자는 어머니가 자신을 단 한 번도 제대로 알아봐 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에 대해 충분히 깊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충분히 깊게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용서이자 사랑이고, 용서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신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리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다음 글을 인용한다. '지나간 고통'이란 '그것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조금도 두렵지 않은, 무기력한 것'


무엇보다 책에 대해, 그리고 읽기와 쓰기에 대해 이토록 정당하고 적확한 표현들이 아름답게 나열된 책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밑줄 긋고 싶은 많은 문장들을 통과하여 책을 덮은 후 어쩌면 독자는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혹은 체 게바라를 다룬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메리 셀리의 책 『프랑켄슈타인』을 찾아보거나, 극지방의 낮과 밤에 대해 길게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또한 저자는 고통이 지켜주는 삶, 새의 눈물을 먹고사는 나방처럼 슬픔이 양분이 되는 삶 속에서도, 단절을 벗어나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타인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그것을 껴안고 그것과 섞이는 삶을 말한다.


저자의 살구 더미는 어떻게 되었을까?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가까운 것들을 함께 진물 속으로 빨아들이던 살구들은,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일부는 병조림의 형태로, 혹은 잼으로, 처트니로…. 그리고 모습을 바꾼 살구는 저자와 타인의 소통을 돕는 도구가 된다.


저자는 끊임없이 묻는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라고.


책을 덮고 이제 저자의 물음에 우리가 답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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