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청춘의 독서』
"이 책을 주면서 사랑하는 딸에게 말하고 싶다. 세상은 죽을 때까지도 전체를 다 볼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으며, 삶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축복이라는 것을"(p.8)
『청춘의 독서』 , 유시민 , 웅진지식하우스
지식인은 누구인가
감시, 도청, 압수 수색, 예비검속 등의 낱말이 일상용어로 거론되던 시절에 저자는 대학생이었고, 시국 사건에 휘말려 제적과 복학을 거듭했다. 그 시절 읽었던 열네 권의 책을 모아 「청춘의 독서」라 이름 붙인 이 책은 지식인의 소명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고민하던 그의 젊은 열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래서 이것은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책들'이라는 부제처럼 시대를 전면에서 들여다보고 전환을 꿈꾸던 책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저자 자신의 인생 역정이 오롯이 담겨있는 책이다.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저자에게 리영희 선생은 '사상의 은사'이며 「전환시대의 논리」는 인생의 교과서였다고 말한다. 그가 지닌 지식인 상은 리영희 선생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에게 지식인이란 성찰하는 비판적 지성, '앎과 삶의 일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베트남전쟁의 배경 속(베트남 전쟁 기밀문서 보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우여곡절)에 리영희 선생이 제시한 네 가지 지식인 상은 그 자체로 상징하는 바가 크며 여전히 그 구분은 유효해 보인다.
1. 월트 로스토(국무성 정책기획 위원장&존슨 대통령 국가안보 특별보좌관)- 광신적 지식인
2. 로버트 맥나마라(국방장관)- 과학 기계 만능주의 지식인
3. 조지 볼(국무차관)- 관료 기구 안에서도 지성을 상실하지 않은 지식인
4. 대니얼 엘스버그(미국 랜드연구소 연구원)- 인식과 실천을 결부시킨 지식인
책을 읽는 이가 살아가야 할 실천적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들며, 동시에 내가 딛고 선 자리가 어디쯤인지를 가늠하게 만드는 구분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E.H. 카.
저자는 50년을 살면서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 하나만을 고르라고 한다면 이 책을 고르겠노라며, '역사와 사회에 대한 개안의 기적을 일으켰고, 어느 정도 내 삶을 바꾸어놓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존경했던 이들은 먼 곳으로 떠났고, 받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외면하고, 같은 방향을 보고 걷는 사람들과도 손을 잡기 어렵다'고 토로한다. 자신을 물 밖으로 팽개쳐진 물고기 같다고 느끼며 지쳤다고 털어놓는다. 민주화 운동가로, 정치인으로, 방송인으로 쉼 없이 시대의 정면에서 시대를 발언했던 그의 피로감이 짙게 느껴지는 고백이다. 하지만 '역사와 사회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에 대한 믿음'이라고, 이 믿음이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그는 이 책이 주는 격려를 믿고 싶어 한다. 그가 아직 인간과 세계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란 느낌을 받은 대목이다.
좋은 책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모든 시대의 역사는 현대사'다. 우리가 여전히 책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책을 통해 과거를 보고 현재를 느끼며 미래를 꿈꾼다. 장르와 무관하게 책은 또 다른 책을 부르고 또 다른 생각을 일으킨다. 역사의 현장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개인의 부끄러움은 두고두고 슬플 것이나, 그 슬픔 안에서도 책은 쓰이고 읽히며 존재할 것이다.
책으로 피로를 견디고, 문학으로 목마름을 달래는 직장인으로 사는 동안 나에게 필요한 건 다음과 같은 문장이었다.
'언어가 있다는 것, 문자를 쓴다는 것,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있다는 것, 솔제니친과 같은 작가가 있다는 것,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다.'(p.202)
더 무엇을 부족하다 이를 것이며, 더 무엇을 기다릴 것인가.
여기, 책이 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