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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록 Oct 24. 2024

하와이, 레이 그리고 무지개

이금이  『알로하, 나의 엄마들』

"레이 또한 단순한 꽃목걸이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두 팔로 안는 것과 같은 의미의 레이는 사랑을 뜻했다." 


알로하나의 엄마들』, 이금이, 창비


동네에 꽃집이 생겼다. 통창 안의 다양한 꽃과 화분들이 눈길을 끈다. 길목이 환해졌다. 이 밝고 화사한 기운 덕분에 환영과 축하의 마음을 전달하는 역할을 꽃이 맡게 되었으리라. 

누구나 향기로운 꽃으로 환영받는 삶을 원하지만, 때때로 인생은 우리 앞에 진흙탕을 내어 놓는다. 우리는 진흙길에 빠져 쩔쩔매며 신발 바닥 가득 진흙덩이를 매단 채 허위허위 걸음을 옮긴다. 



'버들'은 레이가 좋았다. 낯선 하와이 땅에 처음 도착한 순간 달콤한 향기로 다가왔던 예쁜 꽃목걸이 레이. 누군가 예쁘고 향기 나는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잘 왔다고, 그렇게 자신에게도 환영의 마음을 보여주었으면 했다.     


여자들은 장에 가는 것조차 어려웠던 때, 사진 한 장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머나먼 낯선 땅 하와이에 발 디딘 버들. 그녀는 어릴 적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며 의병 활동을 벌이다 아버지가 목숨을 잃은 후, 혼수로 가져갈 새 이부자리 하나 장만하기 힘든 어려운 형편으로 살아야 했다. 시집간 지 두 달 만에 과부가 된 동네 친구 홍주와 마을의 무당집 손녀인 또래 송화. 일제 치하의 조선 땅에서 앞날에 희망을 갖기 어려웠던 세 여자는 사진 신부*가 되어 하와이행에 나선다. 각자의 희망을 마음속에 품고 도착한 하와이. 그러나 그곳은 그들의 꿈과는 거리가 먼 혹독한 노동의 현장이었다. 향기 나는 꽃목걸이가 아닌 진흙탕의 일상이었다.        


1903년, 102명의 대한제국 공식 이민자들이 하와이에 도착한 이후, 7천 명이 넘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사탕수수밭의 노동자로 하와이에서 생활했다. 냉혹한 관리자 밑에서 노예처럼 일하던 그들은 나이나 직업, 재산을 속인 채 한 장의 사진으로 조선 신부를 구했다. 천여 명의 조선 여자들은 가족 부양을 위해, 일본의 지배를 피해, 여자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편견과 굴레를 벗어나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사진만 보고 신부가 되려 하와이에 도착했다. 버들, 홍주, 송화도 각각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새벽 4시 기상 사이렌이 울리면 농장의 고된 노동을 향해 출발하는 남편, 어깨 빠지고 허리 끊어지게 세탁일을 하며 가사에 보탬이 되려는 버들. 조선을 떠나왔어도 노동의 나날뿐이지만, 그들에게는 꿈이 있었다. 배움에 대한 갈망이 깊었지만 현실 앞에 좌절되었던 버들은, 자신의 아이만은 좋은 세상에서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하리라는 꿈이 있었고, 남편 태완은 해방된 조국을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꿈이 있었다. 그들의 고단한 하루하루는 꿈을 향한 투쟁이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돈을 벌어도 자신보다 조국을 위해서 쓰기 바빴다. 돈을 모아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 단체에 후원금을 내기 위해 더 악착같이 일했다." 

일제 치하 조선의 억압과 설움과 가난을 피해 하와이로 떠난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조국을 떠나서도 조국을 잃지 않았다. 조국은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지만, 그들은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그들의 땀과 노고를, 더 나아가 무력투쟁을 통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았다.   

   

하와이 조선인 사회는 박용만 지지파와 이승만 지지파로 갈라져 거의 원수지간이 되었다. 버들과 친구들도 싸움의 한복판에서 갈등에 휩싸였지만 결국은 편 가르기에 동조하지 않고 모두를 아우르는 계 모임을 꾸린다. 그 모임의 이름을 무지개로 붙인 것은 상징적이다. 각각 다르지만 하나로 모여 환하게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무지개처럼, 방식은 다르나 조국 독립의 염원만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름이다.      


버들과 친구들은 파도처럼 수없이 밀어닥치는 삶의 고비를 넘기며 하와이에서의 삶을 이어간다. 그들이 함께 바닷가에 놀러 간 날,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본처가 있는 조선으로 돌아가 버려 혼자가 된 홍주는 말한다. "우리 인생도 파도타기"라고. 그런 홍주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버들은 생각한다. 살아 있는 한 인생의 파도는 끊임없이 밀어닥칠 것이지만, 자신들은 "아프게, 기쁘게, 뜨겁게" 파도를 넘어서며 살아갈 것이라고. 


꽃 목걸이 레이처럼 하나로 연결된 버들, 홍주, 송화 세 여자의 거칠고 진한 삶의 이야기가 가슴 뭉클하다. 남편의 폭력에 고통받던 송화를 구해내고, 남편의 사기 결혼으로 버림받은 홍주와 함께 한 버들, 임신으로 지친 버들을 살뜰히 보살핀 송화, 그리고 서로의 자식을 내 아이처럼 함께 기르고 보살피는 그들의 조화로운 삶의 방식이야말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레이의 끝과 끝처럼 이어져 향기를 내뿜는.     


 "파도가 일으키는 물보라마다 무지개가 섰다."

파도가 일어서고 밀려오고 부서지며 무지개가 드러난다. 우리네 삶도 그러하다. 고난 속에 희망이 슬며시 제 모습을 보여준다. 그곳이 멀고 먼 낯선 땅이라면 파도는 더욱 거셀 것이나, 거센 파도 뒤의 무지개 또한 더욱 찬란할 것이다.  


*사진 신부 :  하와이로 이민 간 남성 노동자들이 신부를 구할 목적으로 고국에 사진을 보냈고, 이 사진을 보고 결혼을 결심한 여성들이 하와이로 들어가 남성 노동자들의 신부가 되었다.  


(*표지 이미지는 알라딘 인터넷서점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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