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
놓아버리고 싶을 때 놓아버리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_자작령(p54)
『지금 여기가 맨 앞』 , 이문재 , 문학동네
천지간 모두가 저마다 맨 앞
한 권의 묵직한 시집이 있다. 앞표지는, 많은 이야기를 품은 듯 하얗게 비어 있다. 한 권의 시집을 손에 쥐면 덥석 시구로 다가서기가 망설여진다. 시인의 불면과, 시인의 응시와, 시인의 눈물이 얼마나 치열하게 직조되어 있을지, 표지 안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붉어지는 까닭이다.
조심조심 낯선 집의 초인종을 누르듯 시집을 한 장 넘긴다. 다른 삶,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았으면 한다, 는 '시인의 말'을 먼저 꼼꼼히 새겨 읽는다. 「지금 여기가 맨 앞」이라는 제목과, '천지간 모두가 저마다 맨 앞'이라는 시인의 자각이 무섭고 쓸쓸하게 다가온다.
1부, 봄날
정말 느린 느림이 없는 세상, 내가 나를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는 세상. 그래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그것이 기도하는 것이라는 시인의 말을 믿는다. 세상에서 제일 바쁜 배달맨도 오토바이에서 내려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 사진을 찍게 만드는,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을 기다린다.
2부, 아직 멀었다
식으면 조금 서글퍼지는 밀가루 내음을 앞에 하고, 아픈 사람이 듣기에는 너무 아픈 좋은 소리들에서 귀를 비낀다. 천장과 방바닥 사이가 자꾸 좁아지고, 마음이 몸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 시간들. 텔레비전을 켜고 나를 끄는 시간. 죄보다 독했던 오해, 치명적이었던 무관심, 본능보다 깊숙했던 욕심까지 나였던 모든 것들과 나이보다 많은 후회들….
서정시를 기억하기 힘든 시절, 강해지려면 내가 더욱 민감해지고 더욱 민첩해져야 하는 세상, 산안개 지독하여 낙석주의 표지판도 보이지 않는 구간. 천천히 가자 마음아 몸아, 더불어 천천히 오르자. 하여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 속에서 몇 번이고 소리 내어 내 인생을 읽어보자. 그래서 그리고 그런데 따위의 말은 이제 쓰지 않기로 하자.
3부, 사랑은 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손이 있다. 그 손을 잡고 싶다. 내가 나인 것이 시끄러워 견딜 수 없을 때 내가 나를 떠날 것 같을 때, 무거운 빈손을 채울 다른 한 손을 찾아 나선다.
도시에서 손은 나쁜 시그널, 리비도의 맨 끝 혹은 첫 지점. 그래도 무거운 빈손을 채워줄 다른 한 손을 찾는다.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으지 않고서는 신이 있는 곳을 짐작도 할 수 없기에, 두 손을 모아야만 비로소 고요해지기 때문에.
사랑은 눈이 아니다. 가슴이 아니다. 사랑은 손이다. 손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모든 벽에 문을 내며 잃어버린 손 하나를 찾는다.
4부, 내가 정면이다
어느 쪽으로든 걸어 나가면 모두 길이지만, 걷지 않으면 모두 사막이다. 땅거미가 흑설탕처럼 어두워져도 저녁 식탁 한쪽이 식어있는 집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과 더불어 더 가난해지고, 상처받은 사람들은 상처 속으로 들어가 상처가 되는 날들. 일상적으로 일상을 일상화하는 눈, 일상적인 눈을 다시 일상화하는 눈, 서로를 노예화하는 눈, 눈들.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길은 무엇보다도 눈을 감는 것이다. 도시 안에서 도시와 더불어 꿈꾸고, 사막에 초원을 이루며, 옛날을 애타게 불러오는 것이다.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역사를 반복하는 것, 우리가 반복하는 우리를 우리는 바꾸지 못하고, 지금 여기가 맨 끝이라는 섬찟한 깨우침.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마지막 문장은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말을 빌려 쓰고 싶다. 이 한 권의 시집에 든 여든다섯 편의 시에 내가 표하는 경의는 이문재라는 한 시인에게만이 아니라 시라는 장르 자체에 표하는 경의이기도 하다,라고. 이 땅의 모든 시인에게 존경을 드리고 싶다.
*이 글은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의 시구를 부분 부분 따서 제 생각과 엮은 문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