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혼비 에세이 『피버피치』
축구장 바깥에서는 절대로 이런 것들을 얻을 수 없다. 전국을 다 뒤져보아도 사건의 중심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해주는 곳은 축구장밖에 없다.(p309)
『피버피치』, 닉 혼비 , 문학사상
총 451쪽의 이 글을 읽는 게 쉽지는 않았다. 내가 아는 선수들이 등장했다면 더 재밌게 읽었겠지만, 모르는 선수들에 관한 이야기로, 더구나 아스널 팬이 아닌 사람 입장에서는 분량이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축구와 축구선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축구 관련 내용들은 재미있고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무언가에 이토록 집착할 수 있다는 게 삶에 대한 회피든 뭐든 부러운 구석이 있다. 나는 무엇에도 이토록 뜨거워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슬럼프, 이런 깊은 수렁에서 아스널이 빠져나오지 못하면 나도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생각……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p253)
작가는 아스널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새로운 선수를 영입하고 희망을 품지만 곧 지지부진한 시즌을 보내는 아스널처럼, 작가가 되기 위해 교직을 그만두고 이런저런 일을 하며 암울한 시기를 보내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아스널과 나는 남들보다 새 출발을 더 자주 하기 때문에 서로 잘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p229)
그리고 리버풀 서포터였다면, 그래서 운을 함께 했더라면 부커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쓴다.
축구팀들은 대단히 독창적인 방법으로 서포터에게 슬픔을 가져다줬다.
... 빅 매치에서 선제골을 넣었다가 지는 방법
... 1부 리그 선두에 올랐다가 침몰하는 방법
... 어려운 원정경기에서 무승부를 이끌어낸 다음 홈경기에서 지기도 한다.
... 이미 최악의 사태는 지나갔다고 안심하는 바로 그때, 축구팀은 늘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p195)
이 책을 처음 읽었던 2023년도에 나는 토트넘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토트넘이 팬들에게 안겨주는 슬픔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어서 위 구절에 깊이 공감하며 읽었다. 토트넘의 주장 손흥민 선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토트넘의 팬이 되었지만, 이 팀은 여러 가지로 팬들에게 아픔을 안겨주곤 했다. 그 당시 경기들은 선제골을 넣은 후 후반에 역전당하는 경기가 대부분이었고, '끝판왕' 맨시티의 홈에서 무승부를 따내고는 그다음 홈경기에서 한 수 아래의 웨스트햄에게 역전패를 당하는 식이었다. 닉 혼비가 거론한, 축구팀들이 서포터에게 독창적인 방법으로 주는 슬픔의 대부분을 토트넘은 그대로 팬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손흥민은 발목 부상이 의심되는 정황이 보였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축구 서포터의 괴로운 삶에 대한 작가의 말들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토트넘은 올 시즌 개막 10경기에서 8승 2무의 상승세를 달렸다. 계속된 승리에 이번만큼은 토트넘이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커졌다. 하지만 11라운드부터 15라운드까지 승리를 놓쳤고 순위도 급속도로 떨어졌다. 토트넘은 1위에서 5위로 밀려났다.(머니투데이 2023.12.8)"
2023년도의 토트넘은 '1부 리그 선두에 올랐다가 침몰하는 방법'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나는 새벽마다 경기결과를 확인하고 이를 악물며 슬픔을 참아야 했다.(축구를 위해 한 시간 일찍 일어나곤 했는데 슬픔은 출근의 피곤함을 몇 곱절로 상승시켰다.)
나는 팀이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팀을 버린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p233)
이것이야말로 지극히 순정한 '사랑'이란 생각이 든다. 누가 무엇을 이렇게나 사심 없이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축구란 이토록 매혹적인 대상인 것을.
축구는 멋진 스포츠다. 골이 터지는 것은 몹시 어려운 만큼 희소성이 있다. 운이 좋으면 경기 내내 서너 번, 운이 나쁘면 전혀 볼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광경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볼 때면 언제나 전율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축구 특유의 속도감과 반드시 어느 쪽에게 유리하다는 원칙이 없다는 점이 좋다. 신체를 접촉하는 경기와는 달리 덩치 작은 선수가 덩치 큰 선수를 이길 수 있다는 점이 좋고, 강팀이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좋다. 날쌘 움직임과 거기에 힘과 두뇌가 더해져야 한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몇몇 스포츠와는 달리 축구 선수들의 동작은 발레처럼 아름답다. 완벽한 타이밍의 다이빙 헤더나 완벽하게 찬 발리슛은, 다른 경기에서는 볼 수 없는 우아한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다.(p308)
위 문장들은 내가 축구를 좋아하는 이유와도 일치하기 때문에 축구에 무관심한 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내용이다.(그래서 길지만 굳이 인용한다.) 오로지 하나의 둥그런 물체를 향해 스물두 명의 선수가 온몸으로 집중하는 모습, 멈추고 싶은 제 몸의 욕구에 반해 전후반 구십 분을 뛰는 의지. 경기를 마친 후 상기된 얼굴과 젖은 유니폼에서 올라오는 열기. 심장이 찢길 것 같은 고통 속에도 뛰는 걸 멈출 수 없는 경기의 혹독함은 한 골이 터지는 순간의 짜릿한 흥분으로 충분히 잊힌다.
한 때 나는 새벽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토트넘의 경기 결과를 확인하고 손흥민 선수를 비롯한 한국인 프리미어리거의 컨디션을 샅샅이 확인했다.(물론 프리미어리그 다른 팀들의 경기 결과나 선수 동향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나는 애국심이 강한 스타일이다.) 특히 축구 유튜브 채널 "김진짜", "스토리 K", "만돌 TV"의 열혈 시청자였고, 다른 축구 채널들도 꼼꼼하게 훑어봤다.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은 날에는 온갖 축구 채널을 섭렵하며 마르고 닳도록 골 장면을 재생했다. 그런 날이면 몸이 몹시 가볍고 흥이 올라 콧노래를 부르며 경쾌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축구를 보지 못했다. 그래도 축구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접을 수는 없어서(사실 축구 이전에는 야구가 나의 사랑이었던 시절도 먼 한때 존재했다.) "괜찮고 괜찮을 나의 K리그"라는 박태하 작가의 책을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다. (박태하 작가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의 저자 김혼비 작가의 남편이다. 김혼비 작가의 책은 재미있게 읽은 터라 이미 나의 북리뷰 목록에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