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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록 Oct 30. 2024

당신의 고전목록은

서경식 『내 서재 속 고전』

자기 나름의 '단면'으로 자신만의 '고전'을 찾아내고 그것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작가의 머리말 중에서)


『내 서재 속 고전』, 서경식, 나무연필



나는 어떤 고전 목록을 만들어 갈 것인가      

'나를 견디게 해 준 책들'이라는 부제가 가슴 먹먹하게 다가온다.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대학교수로 재직하기까지 그의 지난한 삶의 여정이 짐작되는 까닭이다.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가진 저자의 시각으로 선별된 고전 목록은, 기존 고전에 대한 전복으로 읽힐 만큼 새롭다. 이에 대해 권영민(철학연구회 '철학본색'운영자)은 '동서양을 망라한 휴머니즘 전통의 자장 안에 있는 고전의 외양을 디아스포라의 입장에서 확장해가고 있다.(p216)'고 표현했다. '반고전주의'가 아니라 '교양의 확대'로 해석한 것이다.     

 

『내 서재 속 고전』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이니만큼 '고전'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도 있겠다. 고전은 시대를 넘어서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를 고민하는 텍스트이다. 정해진 독해만을 허용하는 억압이 존재하는 반면, 우리가 되풀이하는 인류 보편적 문제 앞에 선 우리를 이끌어주는 힘이 있다.    

  

대학시절, 강의 시작 전 시를 한 편씩 읽어주시던 교수님이 생각난다. 어느 날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시집을 들고 오셨고, 29세의 나이에 심야영화관에서 요절한 시인의 시집이라고 소개하셨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그의 시에 귀 기울였고, 강의실은 '빈집'처럼 고요했던 기억. (브런치에 기형도의 시집『입 속의 검은 잎』리뷰를 올리며 이 이야기를 적었다.)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은 '386의 공동체적 가치와 고뇌 같은 것들을 90년대 세대에게 이어주었다.(p.261)'고 이종찬(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은 말한다. 고전이란 이처럼 세대를 잇는 징검다리 혹은 시대와 시대를 묶는 매듭점의 역할을 한다.  

    

저자의 글쓰기 방식에 주목하다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일반적으로는 책의 내용을 요약한 후 개인의 코멘트를 덧붙이는 방식을 취한다. 그러나 저자의 글쓰기 방식은 특이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출발해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글쓰기로 나아가는 방식을 취한다. 어떤 책이 '어느 순간' 내게 왔고, 다시 나는 '어떤 순간' 그 글을 상기했다는 식이다. 이를 두고 이나라(이미지문화 연구가)는 '서정적 자아'가 드러나는 글쓰기라 표현했고, 이종찬(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은 '신원주의적 글쓰기'라 명명했는데, 이야기의 출발점을 자신의 정체성에서 찾는 것을 이른 것이다. 권영민(철학연구회 '철학본색'운영자)은 '현상학적인 방식과 유사하다'라고 말한다. '자기 사태에 의존해서 사태를 구조적으로 해명하고 거기서부터 보편성을 길러낸다'는 의미에서다.  

   

(*『내 서재 속 고전』의 뒷부분에 함께 엮인 대담록 <우리 시대의 고전과 교양을 찾아서>를 꼭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위 글은 그 내용을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위 세 사람의 말을 종합해 볼 때 저자 서경식의 고전 목록은 자신의 상황으로부터 끄집어낸 것이나, 목록을 따라가다 보면 종국엔 인류 보편의 문제로까지 나아가게 된다는 의미일터이다. 지식이 세세하게 갈라지고 쪼개져 자신의 우물만을 들여다보는 좁은 지식인이 늘어가는 시대, 기술을 이용해 인간을 박해하는 시대.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의 고전 목록은, 나로부터 시작하되 내가 발 디딘 시대의 인간 풍경을 잊지 말라 말한다. 우리가 그의 고전 목록을 응시하게 하는 힘이다.    

 

 '기억'을 '기록'하다      

철 지난 한겨레신문(2017.8.11)을 읽다가 우연히 서경식 칼럼을 발견했다. 제목은 '기억의 학살자들'.     

"국회에서 추궁당한 정치가나 관료들이 이구동성으로 되풀이한 발언은 '기억에 없다' '기록은 폐기했다'는 것이다." 일본 아베 정권 하 권력가들의 몰염치를 적시한 칼럼의 한 구절이다. 그런데 어찌 이리 낯이 익은지. 

    

'기록'이나 '기억', 나아가 '역사인식'에 대한 극단적인 냉소주의다. 기록은 수정 또는 은폐할 수 있고, 기억은 왜곡 또는 소거할 수 있다. 사람들은 결국 '망각'할 것이고, 그것이 권력에 유리할 것이라는 확신. 바로 기억 살육자의 음습한 확신이다. (서경식_기억의 학살자들)     


자신의 욕망만이 판단의 준거가 되고 타자에게는 냉소적인, '윤리적 참사'가 이어지는 이 시대에 고전이란 '기억'을 '기록'함으로써 거짓을 뚫는, 그런 서늘한 날이 되어도 좋을 것이다. 프리모 레비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통해 '강제수용소 경험의 철저한 고찰과 인간존재에 대한 타협 없는 인식'을 우리 앞에 기록으로 남긴 것처럼. '고전'은 이처럼 시대를 증언하는 역할과 더불어 인간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깊은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의 고전 목록 중에서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 『양의 노래』  

나는 자랐다, 병약하게. 예의 바르게, 다른 사람의 애정에 민감하고, 기묘한 정의감이 흘러넘치고, 타인과 어떻게 사귀는지 그 방법마저 전혀 모른 상태로, 자존심 강하고, 어쩌면 퉁명스럽고 무뚝뚝한 아이로, 이제 나는 세상을 향해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양의 노래』, 가토 슈이치, 글항아리, p49)      

     

가토 슈이치의 문장들은 읽는 순간 홀연히 스며들어 그 디테일의 결들이 내 마음속 풍경과 겹쳐지는 느낌. 물론 저자가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을 자신의 고전 목록에 올린 이유는 문체 때문이 아니다. 일본에는 드문 '저항하는 휴머니즘'이 태어나고 자란 모습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유복한 의사 아들로 태어나 유럽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문학·미술·음악에 조예가 깊으며, 캐나다의 대학 교단에 섰던 지식인 가토 슈이치. 교육받지 못한 재일조선인 자식으로 민족적, 계급적 대척점에 있던 저자가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었던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을 그의 고전목록에 올린 이유는 다음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늙은 가토 슈이치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평화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일관되게 고수하고 있었다. 가토 슈이치는 만년의 나날을 헌법 제9조(군대 보유와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조항)를 지키는 운동에 바쳤다. (p.137~138쪽)     


나의 고전 목록을 생각하다      

인간의 단편화가 가속화되고 그릇된 정열이 차별과 증오로 발산되는 지금,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작은 개인의 영역이 참 좁다. 그래서, 다만 읽을 수 있을 뿐이다. 『내 서재 속 고전』에 언급된 책들은 재일한국인이라는 저자의 특수한 위치가 반영된 목록들이다. 그는 그의 위치에서 세상에 저항한다. 나도 나의 위치에서 읽어가야 할 것이다. 나만의 우물 속이 아닌 바깥세상에도 눈을 주며 내 목록을 천천히 채워가고 싶다. 



*이 책을 읽고 가토 슈이치의 『양의 노래』와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그리고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찾아서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고전 목록에도 올려놓았다. 


이 책에서 '비관적 현실을 냉철하게 응시하는 낙관주의자를 만나다' 라고 소개된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과, '관용은 연민이 아니라 생기발랄한 관심이다'라고 소개된  미셸드 몽테뉴의 『몽테뉴 여행 일기』도 장바구니에 담아놨다.('낙관주의자'와 '생기발랄'에 꽂힌 같다.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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