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우물에서 하늘 보기』_ 황현산의 시 이야기
시를 읽고 쓰는 일은 희망을 단단히 간직하는 일이다.(p262)
『우물에서 하늘 보기』, 황현산, 삼인
이 책에 실린 스물일곱 편의 글들은, 2014년 한 해 동안 《한국일보》에 '황현산의 우물에서 하늘 보기'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글들이다.
수면이 요동하며 거기 비친 하늘이 우그러졌다 펴지듯, 작가가 어떤 진실을 만나 그것을 글로 옮길 때도 뜨거운 전율 하나가 그의 존재를 관통할 것이다. 글쓰기의 축복이 이와 같다.(p201)
'읽는다'는 것은 모든 인지와 감정을 통합한 '깊은 것'이 내 안을 통과하도록 허락하는 행위다. '그것(깊은 것)'은 한 존재의 모든 것을 담은 채, 읽는 자의 심장에 칼금을 긋거나 열상(熱傷)을 남기기도 한다. '그것'이 시(詩)일 때 우리는 좀 더 웅숭깊고 단단하게 우리 안에 흔적을 받아 안게 된다. 쓰는 존재를 관통한 전율이, 읽는 존재의 안으로도 스민다.
황현산은 쓰는 이의 뜨거운 전율이 얹힌 문장을 세심하게 부지런히 읽어낸 사람이다. 그의 눈을 통해 들여다보는 시와 시인은 더욱 느껍다. 최승자는 그가 아프게 들여다보는 시인 중 한 명이었다.
기억하는가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 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 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최승자 「기억하는가」
돕는 손 하나 없는 가난에 자신의 재능만을 의지삼은 여성 시인에게 세상('지금보다 관행은 더 많고 관용은 더 적었던 시대')은 퍽도 잔인했다.
최승자는 요양원과 세속세계와 정신병동을 전전하며 쓴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2010)과 『물 위에 씌어진』(2014), 이 두 시집으로 대산문학상과 지리산문학상을 받았다. 당연히 받아야 할 상이었지만 너무 늦게 받았다고 황현산은 한탄한다. 그리고 대산문학상 시상식이 있던 날 최승자를 배웅하며 본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슬픈 어깨'라 칭하며, 그녀의 정신적 위기에서 이 땅의 시가 감당해야 할 위기를 본다.
유신 시절부터 시를 써온 최승자는 "칠십년대는 공포였고 팔십년대는 치욕이었다"(「세기말」)라고 썼다. 황현산은 그녀의 시에 이어 묻는다. "그렇다면 90년대와 2000년대는?"
스물일곱 편의 글 모두를 꾹꾹 눌러 읽었지만, 그중 '<임을 위한 행진곡>을 위해'라는 글 앞에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통증 없이는 들여다볼 수 없는 우리 현대사의 깊은 상처에 닿아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의 한 대목을 다듬어 가사를 만들고 김종률이 곡을 붙인 노래다. 이 시는 백기완이 "유신잔재 청산을 위해 투쟁하다가 붙잡혀 1980년 서울 서빙고 보안사에서 고문의 고통을 이기고자" 썼다고 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백기완은 고문으로 부서져가는 육신으로 혼자 갇힌 채 절규하며 이 시를 썼을 것이다. 골방 안의 그에게는 삶보다 죽음이 가까웠겠고, 그래서 이 시는 노래가 되어 불릴 때도 다른 운동가요와 달리 장엄하고 슬픈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새 시대가 당도한 후 이 노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위한 노래로 대만, 홍콩, 필리핀 그리고 일본, 미국까지 퍼져, 사회운동가들이 제 나라 말로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이 노래는 캄캄한 역사의 한복판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업고 태어나 피칠갑한 이들의 입술에서 불려 왔지만, 이제는 고통스런 모든 기억을 넘어서 우리 모두의 노래로 우리의 곁에 남았다. (아직도 울컥한 마음 없이는 이 노래를 들을 수도 부를 수도 없다.)
*이 글은 『우물에서 하늘 보기』에 실린 스물일곱 편의 글 중 두 편만을 소개했다. 2014년도에 쓰여진 글이니만큼 분위기가 무겁다. 나머지 스물다섯 편의 글도 읽어보시길 권한다.
('젊은 시인들의 후원자'로 불린 저자 황현산은 2018년에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이 작가로 성장한다는 것은 한 세상을 다른 세상으로 바꾼다는 의미인 것이다.(p41)
오늘도 열정을 다해 글을 쓰시는 브런치의 모든 작가님들께 저자 황현산의 이 문장 하나를 전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