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리타 Sep 10. 2022

탈서울 이후의 변곡점들

독일 유학생, 독립 저널리스트, 경계인 창작자로 이어진 어떤 길

1.

2014년 8월 10일, 어떤 젊은 여자가 이민 가방과 함께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가방의 무게는 아마도 수화물 최대 허용치 32kg. 여자는 자기보다 많이 가볍지도 않은 그 가방을 끌고 넓은 공항을 한참 헤매다가, 가까스로 고속 열차에 올라 남부 소도시로 갔다. 기차역에서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간 여자는 기사의 도움을 빌려 간신히 가방을 내리고, 얼떨결에 택시비만큼이나 되는 돈을 팁으로 건네고, 또 가방을 질질 끌며 구식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4층에 있는 어떤 음대생의 아파트를 찾아 들어가는데, 거긴 그 여자가 한 달 동안 지낼 임시 거처. 건물 1층에는 매트리스 할인매장이, 100미터 맞은편에는 매 시 웅장하게 종을 울리는 Maria-Hilf-Kirche, 마리아의 도움 교회가 있었다.  


‘여자’는 8년 전 독일에 도착하는 나의 모습이다. 그 때 수중에 1년 치 생활비 1300만원밖에 없긴 했지만 마음은 ‘웬만하면 돌아오지 말아야겠다’는 이주민이었다. 겉으로는 대학원 합격증을 손에 쥔 전형적인 유학생이었는데, 사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나름의 목표는 ‘탈서울 녹색전환’이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다른 지역에 대해선 잘 모르고, 서울살이에는 확실하게 신물이 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잔디밭에서 작은 벌레들을 관찰하거나 창가에서 딸기와 토마토를 돌볼 때 제일 즐거움을 느꼈던 내게, 서울은 애초에 너무 혼잡하고 삭막한 곳이었지만 성인이 되기까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거 독립이 절실했지만 보증금 몇 천만이 없고, ‘서울에 집 놔두고 여자애가 뭣 하러 자취’라며 부모도 지지해주지 않아서 20대 중반까지 같은 동네에 꾸역꾸역 살았다. 주거 독립 다음의 차선책은 유학이나 귀촌. 장학금을 전제로 미국이나 유럽의 대학원 프로그램에 지원하면서 청년 귀촌 공동체 프로그램도 기웃거렸다. ‘리셋’을 원했다. 정해진 길, 못해도 남들만큼은 안정적일 수 있는 길, 가장 효율적인 길로 가야한다는 가족과 주변 집단의 압력에서 가능한 멀리 벗어나길 원했다.


그리고 앎과 삶이 일치하는 ‘나’로부터 시작되는 ‘녹색전환’도 절실한 화두였다. 정치 구호, 맞다. 그 무렵 환경단체에서 일하며 갓 생긴 녹색당에 가입했다. 대학 때부터 시달린 가부장적인 노조 운동이나, 당파 싸움으로 갈라진 진보 정당들은 싫었다. 공채나 고시에 매달리기 싫었고, NGO들은 계약직 최저임금으로 초과 노동을 시켜서 싫었다. 환경운동가들도 고깃집에서 회식하며 ‘막내’에게 수저를 놓게 해서 싫었다. 택배가 주문 다음날 와야 정상인 나 자신도 싫었다. 브레이크를 걸고 싶었다. 독일 행이 그 무엇도 자동으로 해결하진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작고 여유롭다는 ‘환경도시’에 가면 급진적인 전환이 가능할 것 같았다. 학생 기숙사에 지원했지만 떨어지고, 대신 근처 시골에 있는 쉐어하우스에 들어갔다.


2.

재봉틀로 옷을 짓고 고친다. 사과나무 밑에 나무집을 짓는다. 텃밭에 갖은 채소를 기른다. 자전거로 멀리 강과 들판을 지나 학교에 간다. 지난 봄부터 새로 시작한 소일거리들. 별 것 아닌데 생각만 했었다. 독일에 온지 이제 열 달이 넘었다. 꼭 이렇게 멀리 와야만 했을까. 사람 사는 건 어디든 엇비슷한데. 때로 우울하고 화나고, 소화불량도 다시 온다. 생활비는 늘 아슬아슬하다. 그래도 상상한 대로 살고 있으니 충만하다.

독일에 “유학왔다”가 아니라 “이주해 왔다”고 표현하길 좋아한다. 학위 때문이 아니라 내 삶의 모양과 성질을 바꾸겠다 마음먹고 왔으니까. 일, 사랑, 놀이, 연대의 균형. 너무 ‘열심히' 말고 ‘자연스럽게’ 살기. 먹거리 쓸거리를 직접 만들며 필요를 충족하고, 자연에 가까이 살기. 생활을 단순화하고 마을에서 자족하기. 물건을 사지 않고 나누어 갖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 자기 삶에서부터 출발하는 사회운동. 내가 오감으로 느끼고 고민하고 참여하는 세상. 나와는 별개로 저기 바깥에서 외따로 바뀌어야 할 세상이란 없다.”


독일에 간 이듬해 이런 글을 적었다.


녹색당 정치인이 3선에 성공해 시장직을 했던 20만 명 소도시 프라이부르크는 탈서울 이후 삶터로써 흥미로웠다. 여기선 사업을 하든, 봉사활동을 하든, 정책회의를 하든 ‘기후/환경’이 단연 일관된 화두였다. 녹색당에 투표하는 선량한 백인 중산층들은 유기농 마트에서 장을 보고 아이를 수레를 태워 자전거로 출퇴근했으며, 난민을 환대했다.

환경 거버넌스 석사과정을 함께 밝은 동료들. 고등학교를 방불케하는 빡센 커리큘럼 때문에 지지고 볶고 했던 탓에 정이 많이 들었고, 여전히 느슨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다닌 환경대학원에는 십대 때부터 채식을 하고, 비행기 여행을 거의 하지 않으며 H&M세일 쇼핑에 아무 관심 없는 청년들이 많았다. 그들과 어울리며 나도 앎과 삶을 더 동기화시켰다. 학교에서 우리를 ‘글로벌 환경 행정가’로 키우겠다며 정부 지원금으로 제네바 유엔 본부에 보내거나, 세계 환경운동가 컨퍼런스에 자리를 마련해 준 것도 좋았지만, 일상의 실천가들과 어울릴 때 나는 더 살아있었다. 22개국에서 온 37명의 청년들과 지겹도록 토론하고 협업했다. 이 무렵 나는 스스로를 ‘녹색’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색을 뜻한다.

3.
앎과 삶, 혹은 신념과 실천의 불일치로 화나 있던 내면이 많이 치유되고, 자연 가까이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두 번째 전환이 일어났다. 일기장 속표지에 써둔 ‘서른 살 되기 전에 하고 싶은 일’ 목록에 있던 두 가지 일이 벌어진 것. 목록 2번에 있던 ‘섹슈얼리티 해방: 젠더 공부하기. 심리상담 받기’ 그리고 10번 ‘책 번역 혹은 저술하기.’


대학 때 ‘생활자치도서관’이라는, 운동권 안 좋아하는 운동권 집단에 발을 들일 때부터 ‘페미니스트’는 내가 좋아하는 이름표였다. 페미니즘 덕분에 자존감을 파괴할 것 같은 연애나 비뚤어진 욕망을 품은 남성 권력자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나를 기쁘게 하는 섹스가 아니면 할 필요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또 일찌감치 깨달은 것은, 나에게 오래된 성폭력 트라우마가 있고, 그게 나를 여전히 옭아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안전한 환경에서 심리치료를 꼭 받아보고 싶었다. 독일에서 공보험을 통하면 따로 돈 내지 않고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주 2년차.


성폭력 트라우마 치유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나의 첫 책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2017, 동녘)

나의 치료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면서 다른 이들에게도 힘과 영감을 주고 싶어서 가장 안전한 공간으로 보였던 ‘페미니스트 저널’에 연재하게 되었는데 불과 몇 달 뒤,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성난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여성의 서사,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를 갑자기 모든 미디어가 실어 나르기 시작했고, 출판 업계도 열심이었다. 내게는 칼럼을 책으로 묶어 내자는 ‘출간 제안’이 왔다. 지극히 개인적인, 거기다 섹스가 잘 되니 안 되니, 하는 내밀한 일반인의 이야기를 중견 출판사에서 책으로 만들자고 한 건, ‘가장 개인적인 것인 정치적인 것’이라는 테제가 나 개인의 삶에서 조금은 증명된 셈 아니었을까.


트라우마 치료를 통해 나는 울분을 많이 비워냈고 젠더, 퀴어, 섹슈얼리티에 대해 훨씬 경쾌하게 쓰고 말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치유 경험을 세상에 발화하면서 내가 서 있는 자리와 내 곁에 다른 존재들로 시야가 넓어졌다. ‘경계에 선, 작은 검은머리 아시아 여성’으로서 월경,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라는 새로운 소명을 만났다. 독일에서 나는 ‘중국에서 온 외국인 여자’로 인식되고 페미니즘을 인종차별주의 없이 말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4.
‘소명’이라 말했지만, 사실 시작은 불편하고 억울한 일을 겪으면서도 자존감과 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애씀이었다. 혼자 거리를 걸으면 낯선 남자들이 심심풀이로 ‘니하오’ 캣콜링을 할 때 어떻게 받아 칠까 매번 고민하는 일. 회사 면접 시험에서 1등을 했지만 그 자리로 내가 아니 백인 남자가 출근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 그런 일들 가운데 나의 ‘월경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처음 떠나올 때만 해도 이럴 줄 몰랐다. 어린시절부터 서구 유럽 문화를 소비했고, 영미권에 머물기도 했지만 유럽 사람들이 체화하고 있는 백인우월주의 관념과 감각이 어떤 것인지는 몰랐다. 타고난 성별, 인종과 출신 같은 나의 덩어리진 정체성 때문에 차별과 혐오를 받는다는 것을 겪기 전까진 실감 못했다.


독일에 살아도 ‘나’는 여전히 ‘나’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외국 생활에도 점점 자신감이 붙는데, 사람들은 언제고 ‘나’를 막 여기 도착한 사람, 영화에서 본 이국적인 사람으로 대하는 괴리는 시시때때로 정체성의 위기를 부른다. 이곳에서 내 목소리를 어떻게 낼 것인가? 나의 목소리가 가치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겪은 일들을 어떻게 누구에게 알릴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나름의 답을 찾고 싶어서 지역 페미니스트 모임에서 상호교차성 세미나를 자청하고, 다른 아시아 여성들과 만나고, 난민 모임에서 히잡 쓴 친구들을 사귀었다. 번역-에세이 칼럼인 <우리 자신의 언어로 – 독일 난민들의 말하기>와 인터뷰 칼럼 <하리타의 월경만남>을 쓰기 위해 독일 곳곳에 취재하러 다녔다. ‘출장’이라지만 돈이 부족하니 친구 집들을 전전하고 하루에 한 끼만 사먹었다. 벌이가 시원찮은 프리랜서라서 비자문제로 매번 지독히 속을 썩었다.


이렇게 내일에 대한 대비없이 살아도 될까? 의미 있는 일이지만, 계속할 수 있을까?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할머니의 약손에 배앓이가 낫는 손녀처럼, 흑인 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 이 말을 읽어왔다. “나는 경계에 서서, 가장자리에 서서 거기를 중앙이라고 주장했다. 중앙이라고 말하면서 나머지 세계가 내가 있던 곳으로 움직여 오도록 했다. (I stood at the border, stood at the edge and claimed it as central. Claimed it as central, and let the rest of the world move over to where I was.)"


나의 ‘월경 프로젝트’는 점점 분화하고 진화한다. 다양한 직군, 직종의 한인 여성 18명의 이야기를 다룬 인터뷰 칼럼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28명의 목소리가 담긴 팟캐스트 <탈조선, 다음이야기>, 더디게 쓰고 있는 다음 책 <검은 숲에 호랑이> 같은 것들로. 내 안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살고 있다. 광활하고 컬러풀한 지도처럼, 말소리가 낮게 웅성거리는 오후 4시의 카페처럼.


인터뷰이를 모실 때는 이런 말로 설득하곤 한다.


“저에게 인터뷰는 유명인이나, 거창한 성취를 한 사람을 만나는 자리가 아닙니다. 저의 인터뷰이들은 새로운 삶터와 일터를 찾아 용감하게 떠나온 사람들로, 이들의 여정에는 영광스런 날들보다는 끝없는 시도와 고민, 쓰린 낙담과 실패가 있습니다. 저는 그 울퉁불퉁한 길을 정성껏 따라가려 합니다.”


흔히 말하는 ‘실패한 경험,’ 지나온 시간에 대한 결과론적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정착을 원했지만 중간에 돌아간 사람, 전공한 분야로 취업하지 않고 방향을 바꾼 경우, 비혼을 지향하다 비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혼인신고를 한 일, 독일이 싫어져서 곧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는 듣는다.  

5.
요즘은 입학이나 취업처럼, 현지에 소속을 두고 장기간 체류하러 오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일년 살기’ ‘3개월 살기’ 같은 컨셉으로 오는 이들도 많다. 다양성이 높고 외국인에게 보다 열려있는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국에서 받은 자격증이나 경력을 바탕으로 요가 강사, 타투이스트, 유튜브 편집자, 웹 디자이너, 아로마 테라피스트로 활동하기도 한다. 작업장을 빌리거나 재택근무를 하며 한인 커뮤니티에서 시작한 고객층을 넓혀간다. 섹슈얼리티 자유를 위해 독일에 오는 퀴어 커플들도 종종 본다.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독일에서는 둘 중 한 사람만 체류권이 있어도 ‘파트너 비자’를 받아 함께 지낼 수 있다.  

이 글을 어느 모임에서 낭독했습니다. 준비물은 랜턴, 티벳 싱잉볼, 업사이클링 쉐이커, 원고가 든 스마트폰, 목소리.


2018년 4월에 처음 받은 나의 노동 비자에는 세 가지 직업이 적혀있었다. ‘저널리스트’ ‘통번역가’ 그리고 ‘이벤트 매니저.’ 처음부터 엔잡러를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환경대학원을 다닐 때 시작한 통번역 일은 졸업 이후에 더 늘어서 환경 연수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월경 프로젝트’을 벌여 젠더와 이주를 주제로 창작하는 일은 ‘저널리스트’라는 타이틀로 요약되었다. 한국에서 했던 문화기획 경험을 살려 지역 축제를 열거나, 문화공간에서 전시를 큐레이팅하는 일로는 돈이 벌리지 않는다. 나의 물리적인 존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참여하며 생동감과 유대감을 주기 때문에 한다. 비자 담당 공무원은 이런 설명을 듣고 ‘이벤트 매니저’라고 적었다. 작은 공간을 얻어 ‘Harita Moonrider Arts’라는 명패를 세웠다. 사진, 공예,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작업을 하는 곳. 매일 3개 언어를 돌려쓰다가 감질나고 끝내 서글퍼지면, 때때로 말문을 닫고 대신 몸으로 이미지로 표현하고 존재한다.


한동안 ‘엔잡러’로 살아가는 스스로가 못마땅했다. 뭔가 부족하고 애매한 위치인 것 같아 정규직 일자리를 잡으려고 애쓴 적도 있고, 한 가지에 매진하지 못하는 것을 게으름이나 과욕이라 자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들은 서로 영감과 자극을 주면서 시너지를 낸다. 둘러보면 엔잡러 라이프스타일은 독일에도 흔하다. 장애인 활동보조인을 하면서 일렉 기타를 수리하는 필릭스, 시청 시간제 공무원으로 일하며 밴드 공연으로도 수입을 얻고, 선거 때는 당직자로 뛰는 미하엘. X-Ray 촬영기사이면서 바텐더인 친구 나디아처럼.

6.
나는 사실 좀 ‘우울한 뇌’와 ‘허약한 몸’을 타고났다. 매사에 예민하다. 불행감을 더 자주 강렬하게 느낀다. 그러니까 더욱더 내 멋대로, 하고 싶은 일을 위주로 살겠다. 엔잡러든 창작자든 그저 또 하나의 이름표이다. 얽매이지 않겠다.


삶이 우리에게 주는 보편적 숙제는 사실 이런 것 아닐까.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의 탐구하고 정의하며, 그에 따라 삶을 혁신하는 과정. 자신의 욕구, 성향, 한계에 따라 가장 나은 것을 택하고 그 선택에 따른 이익이나 불이익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결국 ‘어디서 사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방향이었다. 이것을 알기 위해 나는 8년 동안 8천 킬로미터 떨어진 두 세계에 걸쳐 살았다.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
또 새로운 집을 만들고 또 떠난다.
언젠가, 어떻게든, 언제나.


독일에서 살았던 첫 집, '월든하우스'에서 바라보던 노을.

*이 글은 '독일 환경도시에서 급진적인 전환을 맞이하다'라는 헤드라인으로 2020년 7월 24일 발행된 칼럼을 개고한 것입니다. 해당 칼럼은 해외 거주 한국 여성 18인을 심층 인터뷰한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시리즈 중 한 편이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곱 개의 단어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