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 간호사 시절, 회색의 긴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아저씨 환자에게 혈관 주사를 놓게 되었다. 얼핏 보아도 혈관이 좋아 보였다.
‘토니켓(혈관주사를 맞기 전에, 주사 부위의 윗부분을 압박하는 고무줄) 안 묶어도 성공하겠는데?’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찔렀는데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냥 될 줄 알았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환자분께는 실패했다고 죄송하지만 한 번만 더 해보아도 괜찮겠냐고 양해를 구했다.
환자분은 흔쾌히 그러라 하셨다. 그래 첫 번째는 실수였다. 이번엔 바로 성공일 거야!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이미 식은땀이 등줄기를 따라 주르륵 타고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또 카테터에 피가 안 맺힌다.
이쯤 되니 ‘카테터가 불량이 아닌가?’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환자분께는 “죄송하지만, 또 실패했어요... 죄송합니다. 다른 간호사 선생님을 불러드릴게요! 아버님 혈관은 참 잘 나오는데 제가 일한 지 얼마 안 된 탓인가 봐요.. 죄송합니다.”
“아뇨 선생님. 한 번 더 해보세요. 제 딸도 서울에서 간호사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번 더 해보세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 정말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해보겠습니다!”
......
“아버님 정말 정말 죄송해요. 지금 바로 다른 선생님을 불러 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될 때까지 해보세요. 저도 딸아이에게 실험 많이 당해봐서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벌써 세 번째 인걸요? 죄송해서 더는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다음에도 안 된다고 안 하실 건가요? 오늘 한번 될 때까지 해 보세요. 제가 인형이라고 생각하고 해보세요. 주사 많이 찌른다고 죽기라도 하겠습니까? 하하하”
사실 이제는 정말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될 때까지 해라는 그 따뜻한 마음은 감사하지만, 내 실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정말 마지막. 이 좋은 혈관에 4번째 실패면 진짜 간호사고 뭐고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고 소독솜으로 닦고, 혈관 만지기를 반복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카테터에 피가 맺히는 그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문득 우리 아빠가 이렇게 주사를 여러 번 찔리고 있다면 내 기분이 썩 좋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 봐요. 선생님. 세상에 안 되는 건 없어요. 계속하니까 되잖아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하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래도 너무 많이 찌른걸요..? 너무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누구나 실수는 하는 거잖아요. 죄송할 일도 아니고요. 주사 놓는다고 고생했어요.”
“정말 정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이제 푹 쉬세요! 수고하셨습니다.”
겉보기에 혈관이 좋아 보인다고 혈관 주사가 쉬운 게 아니었다. 진땀을 흘리며 간호사실로 돌아와, 주삿바늘에 찔리기 싫은 것처럼 꿈틀대던 혈관에 4번 만에 성공했던 원인을 선배를 통해 알게 되었다. 크고 굵은 혈관은 생각보다 너무 잘 움직인다는 것.
그래서 움직이는 혈관을 최대한 힘껏 당겨 지지한 다음, IV(혈관주사)를 해야 한다는 것.
배움에는 끝이 없다더니 선배가 아니었다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쓸모없어 보이는 시절, 그토록 좋은 혈관을 눈앞에 두고 왜 계속 실패를 했는지, 한 명의 환자 팔에 주사를 4번이나 찔러 겨우 성공했다는 자괴감에 한참 빠져있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나는 그날 또 하나를 배웠다.
신규 간호사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성장해 나갈 것이다.
생각보다 주위에는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기죽지 말자.
자기 일도 바쁠 텐데 계속 실패한 원인을 나무라지 않고 군 말 없이 따뜻하게 설명해준 선배에게 감사하고, 아무리 딸 같은 마음이랄 지라도 선뜻 팔을 내주신 환자분께 죄송하고 또 감사한 마음뿐이다.
이 자리를 빌려 회색 장발의 아저씨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환자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