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장교(2)
이례적으로 교관은 나에게 그 지휘실습 보고서를 보여주었다.
나는 억울했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OBC(초군 군사학교) 성적에도 반영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성적에는 관심이 없었다.
지휘실습 기간 내내 나는 그들의 세계에서 도움받고 배려받는 폐급이었다.
모든 실습생들이 한 마음으로 8시간을 걸어 올라 뜨겁게 맞이했다던 그 향로봉의 일출을 나는 결코 볼 수 없었다. 행군간 병사가 놓친 40kg 짜리 유탄 발사기 거치대도 당시 부중대장 부임이 예정된 내가 짊어져야할 무게였지만, 어미 잃은 새처럼 중대장을 부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고작 2주 전 장절제 수술을 받은 환자였기 때문이다.
교관과 군의관은 실습 참가를 말렸지만, 그래도 부임해야 할 부대를 먼저 방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나섰지만 나에게 요구된 것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어떻게든 견뎌내는 것이 아닌 간부로서 임무를 당당히 수행해내야 하는 능력이었다.
결과적으로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는 그들의 기준에 들지 못하는 폐급이었다.
잠시 마주했었던 그 부대는 이제 내 미래가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폐급의 삶이라는 미래가 다가올수록 내 마음은 과거에 대한 후회로 가득찼다.
"전역 하는게 좋을 것 같다."
수술 후 다음 날, 오후 일과를 마치고 병실에 찾아온 교관은 나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그는 작년과 올해 나를 두 번이나 구한 은인이었다. 그가 내 상태를 이상하게 여겨 군의관이 아닌 병원 진료를 받도록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동복유격장의 비석이 되었을 것이다.
전남 장성에 위치한 상무대는 한눈에 훑어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다. 왠만한 대학교 캠퍼스보다 훨씬 큰 상무대는 전투병과의 간부들을 교육하는 학교 기관으로 그 안에는 총 5개 학교가 존재했다. 그리고 이 학교 중 유일하게 보병학교만이 유격훈련을 실시했다. 하필 보병인 나는 그 유격훈련의 특정 장애물에서 배를 다쳐 소장이 파열되어, 유급한 유급생이었다.
다른 동기들은 모두 부대를 지휘실습을 다녀오고 곧 졸업하고 부대로 당당히 임무수행을 하러 나갈 때,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배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그 교관의 배려로 다음 초군반 과정까지 상무대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으며, 올해 돌아온 초군반 과정에서도 교관의 학급에 소속되어 초군 과정의 교육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똑같은 유격훈련, 똑같은 장애물에서 똑같은 소장의 파열이 일어나자, 나를 지난 1년간 누구보다 응원해온 그 교관도 어쩔 수 없이 무겁게 입을 연 것이었다.
당시 보병학교의 규정에서 유급은 1회만 허용이 되었다. 2회의 유급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이는 초군반의 탈락을 의미했다. 그렇게되면 자연히 중위 진급도 있을 수 없으며, 아니 크게는 현역복무부적합 심의에 오를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관은 의가사 전역을 권유하였다. 당시 수술을 집도한 조선대병원의 외과장과 그의 제자인 함평병원의 군의관 모두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나에게 있어, 군은 신성한 의무 복무의 공간이었다.
나는 직업으로서의 임무 수행에 대해는 고려치 않은채, 오직 나의 복무를 다하고자 결심했다.
그리고 의사의 권유를 무시하고, 함평 병원으로 후송을 가지 않은 채 보병학교로 복귀했다.
그렇게 수술후 5일 만에 나는 인제의 12사단으로 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