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에서 인제로

연락장교(4)

by 하까몽

그 전화를 받고 1주일 뒤, 나는 정든 장성의 상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나는 처음 임관하고 꼬박 1년을 상무대에서 보낸 셈이 되었다.

남들이 가장 힘들다고 고백하는 그 소위 시절의 대부분을 상무대에서 보낸 것이다.

당시 진급일은 임관일을 기준으로 했으므로, 나는 부대에 6월 말에 전출되어 몇일 뒤 중위로 진급할 터였다.


나는 같은 초군반 교육생들 보다 군번도 빨랐고, 중위(진)에 해당했기 때문에 이를 아는 몇몇 교육생들은 선배로 불러주며 대우해주곤 했다. 사실 그들은 학군, 3사, 육사 등 후보생이나 생도 시절을 최소 2년에서 4년 가까이 보낸 이들로 이제 막 군생활 1년이 지나는 학사장교인 나보다 따지자면 더 짬밥이 많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군대의 군율은 지엄하기에, 이를 따르고 선배로 대우해주는 그들의 배려가 내심 고마웠다. 그러나 이제 후배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벗어나 선배들만 가득한 부대로 가야만 했다.


그래도 1년 간의 상무대에서의 생활에서 그래도 교관의 배려와 그동안 먹은 짬밥의 힘으로 학교장 표창을 하나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나름대로 나에게 있어선 폐급이 아니라는 하나의 징표였다.


그리고 또한 그 향로봉 부대가 아닌 사단 본부로 향한다는 것도 내심 위안이 되었다.

연락장교가 무슨 일을 할련지 어떤 보직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특전사에서 오래 복무한 교관들도 연락장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야전부대에서 근무한 한 교관은 연락장교는 상황장교라고 이야기했다. 문제는 나는 상황장교도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실망으로 가득찬 중대장 아래 들어가는 것 보다 폐급이라는 낙인은 남아있을 지언정 얼굴을 처음 맞대는 곳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사단 본부에는 동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초군반 수료식을 마치고, 각 지역별로 대절한 버스를 타고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금요일 수료식 이후, 월요일 전입까지 남은 주말을 집에서 보낼 수 있게 하는 학교장의 배려였다.


그렇게 나는 사단으로 전입신고 하기 전, 외박으로 잠시 고향인 인천에 들르게 되었다.

지난 1년간 두 번의 수술로 누구보다 마음을 졸이셨을 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불의의 사고와 그로 인한 결론이 유급, 체력저하, 폐급이라도 그래도 그 때는 그저 누구보다 멋지게 복무할 수 있을거라는 그런 근거 없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줄기 소망을 가진 채 월요일 새벽, 동서울 터미널에서 인제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손에 든 베레모에 박한 오만촉광의 다이아 하나가 눈이 부시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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