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의 인간관계 따위에 정 주면 안 되나 봅니다
오랜만에 간호사 후배를 만났다. 그동안 밀린 근황을 서로 전하고 병원 이야기도 하다, 후배가 말했다.
"최근에 같이 일하는 병동 선배에게 상처 받았어요."
새삼스럽긴, 후배 괴롭히는 선배 간호사야 우리 둘 다 너무 잘 알고 있잖아? 병원에서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걱정이 됐다. 여차 하면 발사하려고 욕부터 장전하고 들을 준비를 하는데, 후배가 꺼낸 이야기는 내 예상과 달랐다.
"일 하면서 장난도 칠 정도로 친한 1년 선배가 있어요. 최근에 그 선배에게 인계를 준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인계 끝나고 선배가 환자를 보고 오더니 다짜고짜 '저건 너무 더럽지 않아? 너무 심한데?'라고 높은 톤으로 지적을 하는 거예요. 우선 죄송하다고 하고 가서 확인해봤는데 솔직히 그렇게 얘기할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선배가 오늘따라 기분이 나쁜가 보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너무 속상한 거예요. 집에 가서 혼자 울었다니까요.
그래서 왜 이렇게 속상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제가 그 선배를 직장 동료 이상으로 친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는 선배와 내가 인간적인 유대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에겐 내가 자기 기분이 안 좋으면 아무렇게나 말해도 되는 간호사 후배 중 하나일 뿐이었던 거죠."
나는 선천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도록 태어난 사람이다. 내 안에는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해야만 채워지는 뭔가가 있다.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다니다 '나와 잘 통한다', '재미있다'라고 느껴지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의 문을 활짝 연다.
하지만,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곧, 관계에 선을 긋는 능력에 선천적인 결함이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도 병원에서의 인간관계는 쉬운 편이었다. 내가 세운 병원 인간관계의 원칙은 단 하나, '이 사람과 나의 관계는 철저한 수직 관계임을 잊지 말자.' 였으니까. 보수적인 병원 분위기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윗사람을 편하게 대하는 낌새를 보이면, '요즘 애들은 예의가 없다.'라는 둥 뒷꼭지가 시끄러울 것이 뻔했다. 그래서 선배 간호사나 상사가 나를 좋게 봐주고 편하게 대해준다 해도 나는 철저하게 예의를 차렸다. 그분들이 원하는 대로 항상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데 익숙해지니, 자연히 마음의 문은 닫혔고 나의 입도 닫혔다.
그에 비해, 지금 회사의 분위기는 정 반대로, 대표님의 아재 개그가 철저하게 디스 당하는 것이 일상이다. 그리고 이 곳에서 만난 나의 직속 상사는, 밖에서 만났다면 내가 진즉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을 사람이다. 나와 성향도 비슷하거니와 사적으로, 업무적으로 본받을 점이 많은 분이라 생각한다. 특히 부하직원에게 허울 없이 대해 주시는 모습이 좋았다. 이런 분을 상사로 모시게 되어 행운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든 완벽한 상사는 없는 법. 요즘 나는 혼란함을 느끼고 있다. 최근 내 업무량이 많아지면서 지적을 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상사의 말투는 매서웠다. 나는 상처 받았다. 물론 업무적으로 부족한 부분의 지적은 마땅히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상사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병원에서는 더 한 일도 있었는데, 이 정도야. 그런데 생각보다 상처가 오래갔다. 생각은 맴돌았고, 생각이 맴돈 자리엔 자꾸 상처가 났다. 왜 이럴까. 병원 떠나왔다고 그새 멘탈이 약해진 건가. 처음 하는 일이라 주눅이 들어 그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후배를 만났다. 그리고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알 것 같았다.
나는 병원에서는 철저하게 선을 지켰다. 간호사가, 병원이 싫었으므로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은 쉬웠다. 누군가 나에게 지적하고, 화를 내고, 활활 태울지라도 '사람'에 대한 실망은 없었다. 애초에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상사를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내가 너무 아마추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자유로운 회사 분위기에 들떠 직장 인간관계 따위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상사와의 관계를 어떻게 달리해야 할까. 나는 나의 이야기를 어느 선까지, 어떤 톤으로 해야 할까. 병원은 무조건 굽히고 들어가면 중간은 갔다. 하지만 지금 우리 회사의 분위기에서 나만 병원에 있는 것 처럼 상사를 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내 맘대로 하자니 또 중심을 잃고 혼자 상처 받을 것 같다.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서 우선, 입을 닫고 있기로 했다. 결국, 또 병원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