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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니 Jan 22. 2019

커피를 탄다는 것에 대해서

병원에서 타는 커피와 지금 회사에서 타는 커피

우리 부서엔 간호사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원로 교수가 있었다.


그는 아침마다 담당 간호사에게 커피를 요구했다. 병원에서 30년 넘게 근무한 그에겐 그것이 오래된 일상이었고,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이 이상한 문화는 이미 너무나 굳어져 있어서 이것이 부당하다 생각하는 간호사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의 커피 타임은 간호사 트레이닝 시 주요 인계사항 중 하나였을 정도였다. 심지어 인계내용에는 원로 교수의 커피 취향도 포함되어 있었다. '매일 아침 여덟시 반, 뜨겁고 진한 원두 커피를 전용 잔에.'


일개 신규 간호사였던 나 또한 그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그 교수와 함께 일하는 날, 출근해 커피를 타고 있자면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와 서러움이 뒤섞여 치받혀올랐다. 일을 하면서 열 받을 일은 널리고 널렸지만 이 시간에 느끼는 좌절감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그래도 커피 타는 일이 하루에 한 번이면 다행이었다. 재수가 없으면 학생이나 제약회사 영업사원 분까지 두세잔의 커피를 타야하는 날도 있었다.


"모니야, 커피 두잔만. 뜨겁게~ 알지?"

그 교수가 능글맞은 얼굴로 이딴 커피 주문을 할 때면 구역질이 올라왔다.


하지만 더 역겨운 건 묵묵히 커피를 내리고, 커피를 쟁반에 받혀 대령하는 내 모습이었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30년 넘는 경력의 은퇴를 앞둔 대학 병원 교수"의 커피 오더를 "어린 신규 간호사"가 어찌 할 방법은 없었다.


병원에서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커피를 탄다'는 행위에는 잡다한 경험과 감정들이 얹혔다. 어느 순간부터 내게 '커피를 탄다는 것'은 서럽고, 굴욕적이며, 한없이 무력해지는 일이 되어있었다.





새 회사에 출근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커피 탈 일이 생겼다.


미팅 건으로 외부에서 손님이 오셨는데, 나도 참관하기로 한 미팅이었다. 모든게 아직 낯설었던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른 팀원이 손님을 회의실로 안내하는 모습을 뒤에서 엉거주춤 지켜보고 있었다. 손님을 회의실에 안내한 뒤, 그 팀원은 손님에게 물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라는 말이 끝나고 손님이 대답을 하기 전. 그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막내사원인 내가 커피를 타야겠다는 것. 하지만 머리와 달리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기분 나쁜 감정들은 이성보다 빠르게 나를 잠식했다.


"아, 네. 따뜻한 커피 한 잔 주세요."


손님이 대답했다. 내가 잠시 머뭇거리는사이, 커피를 권했던 팀원은 벌써 탕비실로 향하고 있었다. 뒤늦게 뒤따라간 내가 "커피는 제가 탈게요."하자, 그는 손을 내저으며 정말로 괜찮다고 거듭 말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나는 혼자 오바한 것 같아 머쓱해졌다.



이후로도 많은 손님들이 회사를 방문했다. 그 때마다 팀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님을 안내하고, 커피를 권했다. 인턴이 손님을 받으면 인턴이, 부장님이 손님을 받으면 부장님이 손님을 안내하고 커피를 탔다. 일련의 행동들은 어느것 하나 빠질 것 없이 자연스러웠다. 병원에서 온 나만 혼자 달나라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얼떨떨한 기분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손님들은 우리 회사를 오고 갔다. 나는 손님을 맞이하고 커피를 타기도, 때로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회사에서의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나의 커피 트라우마도 점차 잦아들었다.


오늘도 회사에 손님이 왔다. 나는 손님께 커피 드릴까요? 여쭤보고, 탕비실로 들어가 따뜻한 커피를 탄다. 별 생각없이 커피를 탄다. 그러다 커피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렸던 시절을 떠올린다. 여기나 거기나 커피를 타는 행위는 분명히 같은데. 하면서.





최근, 같이 일했던 동료 간호사에게 병원 근황을 전해 들었다.


간호사들 사이에서 원로교수의 커피심부름에 대한 반감이 심해지는 와중에, 마침 탕비실에 있던 커피머신이 고장났다고 한다. 수선생님께서는 이 김에 아예 커피머신을 치워버리는 결단을 내리고, 원로교수에게 이만저만해 이제 간호사들이 커피를 준비하기가 어렵다. 라고 어렵게 말씀드렸다. 그래서 모두들 이렇게 커피 심부름이 끝나는 줄로 알았는데... 며칠 뒤, 원로교수가 커피가루를 들고 간호사 스테이션에 나타났다.

"이건 머신 필요 없이 커피 필터로 내리면 된다는데?"



정말이지,

병원을 나오길 정말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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