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의 머그잔 이야기
우리는 세상이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모든 것을 나누고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이분법(Dichotomy)에 익숙해 있는 듯 합니다. 모든 서양철학이 근본이 그러하듯이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이 용어(헬라어의 dicha는 '두 쪽으로'를 의미하고, temnein은 '나누기'를 의미합니다)는 신학적으로 인간이 존재에 있어서 영혼과 육체라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부분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며 인간의 본질에 접근을 할 때 사용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 이분법의 두 가지는 실로 대조적이고 상이한 기원을 갖고 있으며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들로서 간주되는 범주에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영혼과 육체를 비롯한 이분법의 문제는 우리 사회에 실로 어려운 문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육체와 영혼’ ‘선과 악’ 등 우리가 흔히 서양철학에서 가까이 할 수 있는 이분법의 예들인데 때로는 이들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어왔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 자체를 이분으로 보는 서양의 차가운 철학보다는 동양의 음양, 즉 이분법적으로 두 대상을 그대로 보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조화를 이루며 상호작용을 한다고 보는 동양적인 사고 또한 나에게는 무척 친근감이 더해집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우주로 보고 인간을 소우주로 구분시켰던 고대 로마제국의 음악이론가 보에티우스의 ‘음악의 원리’에 보면 우주의 음악이란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예를 들면 사계절) 등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인간의 음악은 우주적 질서의 원리가 소우주인 인간에도 적용되어 인간의 영혼과 육체, 각 부분간의 조화와 연관 그리고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에 있어서도 서양철학에 근거한 이분법의 잣대를 적용하는 듯 합니다. 중세시대의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이 그러했고 현대의 장르구분 또한 그러합니다. 가끔 사람들이 나에게 ‘당신은 클래식을 공부하였습니까 아니면 대중음악을 공부하였습니까?’ 라고 물어올 때에 나는 참 난처한 입장에 빠지곤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웃으며 순수음악을 전공했노라고 얘기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양음악을 공부를 하고 있으면 대부분이 클래식을 전공을 한다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클래식음악이란 18세기 중반에서19세기 초까지 음악을 말하니까 말입니다. 즉 클래식 음악을 공부한다는 것은 18,19세기 음악을 공부합니다 라는 표현과도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음악을 공부한다는 것은 클래식을 공부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클래식은 대중음악보다는 한 단계 수준 높은 음악으로 평가를 매길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클래식음악의 의미를 생각하지도 않고 말입니다. 18,19세기의 클래식음악은 그 당시의 대중음악이었던 사실을 알고 있다면 대중음악과 클래식음악의 오묘한 조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토벤의 음악도 엄연히 당시의 대중음악이었던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까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클래식음악과 대중음악을 구분하는 이중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서양문명에 익숙한 우리의 대조적이고 상이한 서양철학의 가치판단의 기준에 의한 이분법적 구분론의 희생자가 되어있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감히 많은 분들에게 이분론적인 두 대상이 구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조화와 질서, 그리고 상호작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양적 사고 또한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클래식이냐 대중음악이냐의 논쟁이 없어지지 않을까요? 21세기에는 20세기 대중음악이 클래식음악으로 바뀔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