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록 Oct 22. 2024

글쓰기, 그 하찮음과 위대함

옆자리 총각이 소설책을 읽고 있다. ‘T발 씨’에 전 ‘2찍남'이자 현 ‘반정부세력'인 옆자리 총각이 소설책을 읽고 있다.소설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몇 년 전이란다. 


“채식주의자 재미있어서 ‘소년이 온다'도 샀는데요.”


잊고 있었다. 글이라는 게, 문학이라는 게 그런 거라는 걸. 글 쓰는 일을 하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하얀 백지가 시베리아의 설원 같아서, 깜박이는 커서를 보다 스르르 눈이 감겨 그대로 얼어죽을 거 같은 느낌. 그 모든 짓이 어떤 무용함을 향한 넋나간 손짓 같아서 까무룩해지는 순간들.


글쓰는 일만큼이나 쓰잘 데 없는 일이 어디 또 흔한가. 딱히 누군가의 배고픔을 채워주지도, 누군가의 헐벗음을 덮어주지도 못하는 일이다. 쓰는 이의 지적 허영을 채워주거나, 쓰는 이의 잘못을 궤번으로 덮어주기는 해도 말이다.


인간은 간사하고, 글과 말은 행동보다 훌륭하기 마련이다. 좋은 말을 뱉는다고 좋은 인간이 되기는 쉽지 않았고,깊이 있는 글을 쓴다고 깊이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은 더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글로 자신의 삶을 분칠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던가. 


나는 내가 써놓은 글 앞에서 면구하여, 돌아서는 일이 적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SNS에 글 같은 걸 안 쓴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옆자리 총각이 소설책을 읽고 있다. ‘T발 씨’에 전 ‘2찍남'이자 현 ‘반정부세력'인 옆자리 총각이 소설책을 읽고 있다.


그러니까 글이라는 게, 문학이라는 게 그런 거였다. 


어떤 ‘시적 정의’ 같은 것. 마사 누스바움이 말하는 그대로의 어떤 ‘시적 정의'. ‘공공’이라는 이름으로 규격화된 정의와 그 규격화된 정의조차 제멋대로 재단하고 왜곡한 정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한 개인이 마주한 부당한 현실에 대해 공감해주는 것.당신의 고통이 당신의 탓이 아니라고, 설사 당신의 탓이라 하더라도 당신의 잘못은 아니라고 토닥이며 이해를 전하는 것.


그럼으로써 규격화된 정의와 왜곡된 정의를 넘어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것.그렇게 누군가의 배고픔을 채워주진 못해도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누군가의 헐벗음을 덮어주진 못해도 누군가의 상처를 핥아주는 일 말이다. 


물론 문학이나 글 따위가 세상을 구원할 리는 없다. 그러나 아주 가끔, 아아아아주 가끔 어느 한 인간의 삶을 구원할 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세상에는 의외로 그런 일이 흔치 않다. 


작품에 대한 취향과 작가에 대한 정치적 호오를 빌미 삼아 트집을 잡으려들기보단, 누군가 넌지시 지금 우리에게는  혹은 그대들에게는 이런 가치가, 이런 시선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말을 건넨다면 한 번쯤 귀기울여 보는 게 더 나은 선택이지 않을까. 


뭐, 어쨌거나 옆자리 총각이 소설책을 읽고 있다.

왠지, 다시 글이라는 걸 좀 써봐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