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은 당연한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정신의학자이자 의미심리학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은 인간에게 앗아갈 없는 자유가 한 가지 있다고 한다. 워낙 유명한 문구이니 한 번쯤을 봤을 것이다.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는 있지만
한 가지 자유는 빼앗아갈 수 없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삶에 대한 태도만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인간은 언제나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다. 때로는 선택을 하지 않음으로써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빅터 프랭클이 이야기하는 선택은 ‘삶에 대한 태도’라는 선택이다. 이건 밥을 먹을지 말지와 같은 하나의 행동이 아니다. ‘삶에 대한 태도’라는 선택을 한다고 해서 냉큼 그 태도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그 선택은 일종의 방향성을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태도를 구축하고 갈고닦아야 하는 길이 남아 있다. 이것은 어떤 의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삶의 태도를 지속적으로 끌고 나아가가기 위한 구조화된 의지.
생각해 보면 그건 어떤 당연함을 향한 지향성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이르러 처음의 질문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이 질문은 그래서 ‘나는 어쩌다 이런 내적 모델을 구축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꿔볼 수도 있다.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삶의 태도’라는 건, 결국 그 자체로 세상을 대하고 바라보는 하나의 내적 모델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어떤 습속의 결정체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의 총화, 그리고 그 경험들을 해석하고 반영하여 다시 쌓아온 데이터와 패턴의 결과물들. 그것들을 재료로 하여 통해 스스로 만들어 낸 일종의 스토리텔링.
미시적으로는 신념이라고 부르기에도 좀 우스운 일상적인 신념 – “한 번 쓴 물건은 제자리에 둬야 해” 같은”-에서부터 일종의 거대 서사를 아우르는 신념 –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같은 –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의 신념들로 이루어진 사고하는 동물.
그러니, 그 기저에는 신념이라는 형태의 가치판단이 한 줄 한 줄의 코드처럼 새겨져 있다. 신념이라고 하면 거창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당연함에 대한 인식이다.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
그 당연함에 대한 인식은 자연스레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하니까.
이렇게 하는 게 옳고, 저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아.’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당연한 것’을 따라 살아간다.
문제는 나에게 당연한 것이, 타인들에게도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항상 쓰던 단어지만, 갑자기 그 뜻이 궁금해져 살펴본 ‘당연’의 의미는 이랬다.
당연(當然) : 일의 앞뒤 사정을 놓고 볼 때 마땅히 그러함. 또는 그런 일.
당연은 ‘마땅히 그러한 일’이지만 그저 ‘마땅히 그러한 일’은 아니다. 일의 앞뒤 사정을 놓고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문제는 생겨난다. 어떤 일을 대할 때, 사람들마다 앞 뒤의 사정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나의 앞뒤와 누군가의 앞뒤는 저렇게나 다를 수 있다.
더 만들어보자면 이렇게 된다.
‘원’ 하나만으로 생각해도 저렇게나 복잡한데 원이 아닌 3차원의 구(球)라면 고슴도치마냥 뾰족뾰족한 당연들이 생기고 쌓여난다. 고작 3차원만 떠올려도 당연함의 실체는 사라진다. 11차원이 되는 뇌세포 수준에서는 그 앞뒤의 당연함이라는 게 어떻게 어떤 식으로 튈지는 감도 못 잡겠다.
이렇게나 다양할 수밖에 없는 ‘당연함’들 중에서 우리는 어떤 하나의 당연함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당연함이란 너무도 당연하게,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나를 지탱하는 중요한 토대이지만, 동시에 그것에만 집착하는 순간 일종의 아집이 된다. 그것은 ‘내가 보기에 당연한 것’ 일뿐이다. 그것은 종종 틀릴 수 있고, 이상한 스토리텔링이 더해지면 망상이 되기도 한다.
물론 많은 이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 교집합에서부터 우리는 원칙을 세우고 상식을 만들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한다. 사회 질서와 정의에 있어서는 그런 게 맞을 테다. 인간이란 결국 사회적 동물이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려면 어떤 공통의 신념이나 가치가 필요하다. 세 명이 모여서 일을 하려고 해도 프로세스를 만들고, 그라운드 룰을 정하게 마련이다. 그런 것이 없다면, 사회라는 건 유지되지도 못할 테니까. 그래서 우리는 ‘상식’이라는 것에 기대어 최소한의 동기화를 하며 이 사회를 이루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의 관계에서는 그런 생각들을 조금은 접어두는 게 낫지 않을까.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하고, 저렇게 사는 게 당연하고.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 ‘당연’들에 대한 집착이 서로를 고달프게 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명절마다 이루어지는 가정의 불화들의 대부분은 그런 것들이다. 할아버지의 당연과 아버지의 당연과 나의 당연은 다르다. 시어머니의 당연과 며느리의 당연은 다르다.
“우리가 '확실성'으로 경험하는 것은, 즉 자기 자신, 다른 사람, 주위 세계에 관해 무엇이 진실인지 안다는 느낌은 우리가 하루하루를 잘 헤쳐 나가도록 뇌가 꾸며낸 착각이다. 이따금 확실성을 조금 내려놓는 것은 좋은 생각이다. 예컨대 우리는 모두 성격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 관해 생각하곤 한다... 우리는 확실성의 느낌에 사로잡혀 마치 이들의 너그러움, 정직, 멍청함이 실제로 이들의 본질이며, 이들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마치 이것들을 객관적으로 탐지하고 측정할 수 있는 것처럼 취급하기 쉽다. 이런 태도는 이들을 향한 우리의 행동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런 행동이 정당하다고까지 느끼게 만든다... 확실성은 다른 설명 가능성을 놓치게 만든다. “
-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사 펠드먼 배럿
우리는 어떤 확실함에 기대어 살아가고 싶지만, 그 확실함은 끊임없이 뒤로 밀려난다. 기의에 가닿지 못하는 기표처럼 그것은 끊임없이 유예된다.
어릴 때는 자신만의 신념이 투철하고,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멋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이들은 멋있다. 하지만 살다 보면 또 느낀다. 한 인간이 믿고 말하는 것과 그 인간 자체는 별개라는 걸. 말과 행동이 다른 경우는 너무 흔하다. 꼭 위선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종종 자신이 뭘 하는지도 잘 모른다. 예를 들면 정말 편하지 않은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는 “편하게 말들 해봐!”라고 얘기하는 상사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고 그들의 그 말이 거짓은 아니다. 적어도 어떤 점에서는 그들은 부하직원들이 정말 편하게 말하는 걸 듣고 싶기도 하다.(자신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인 경우가 많지만)
반면, 옳은 신념을 가지고 있더라도 옳지 않은 방식으로 상대에게 얘기하는 경우도 있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주제라 하더라도, 그걸 전하는 방식이 무척 강요에 가까운 경우랄까. 해서, 어떤 확실한 가치를 내세우는 순간 종종, 그것은 폭력이 되기도 한다.
남일처럼 써뒀지만, 결국 나도 그런 모습으로 살아왔다. 결국 한 인간의 성숙함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기준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쌓아온 세계, 그 내적 모델에 위기가 생기는 상황에서도 상대를 의연히 대하는 이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눈에 들어오는 이들은 어떤 유연함을 지닌 이들이다. 스스로의 생각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염두에 두는 이들, 새롭게 알게 된 것, 새롭게 경험한 것들 앞에서 자신이 고집하던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이들.
그러게, 진작 좀 그럴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