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일종의 확신범이다. 우리는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을 확신하며 삶의 결정과 선택을 이어간다. 우리의 행동들은 그런 확신에서부터 스며 나온 행위의 파편들이다. 그 확신들은 때로는 옳고, 때로는 그를 것이다. 그 확신들로 인해 우리는 알게 모르게 때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때로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고, 때로는 문제가 더 복잡하게 꼬이기도 할 것이다.
살아오면서 차곡차곡 쌓여 만든 그 일상의 오리진 씬들이 우리에게 어떤 신념과 가치관을 만들게 만든다. 그런 식으로 우리 뇌의 신경세포들의 활성화 패턴을 만들어 내는 것일 테다. 그러니 신념이란 어쩌면 우리 머릿속에 심어진 한 줄의 코드 명령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동안의 기억과 경험을 기반으로 새겨진 한 줄의 코드. 그래서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그 코드가 실행된다. 기존에 어떤 사안에 대한 어떤 분류와 나름의 판단을 한 상태일 것이고, 이제 비슷한 사안이 생겼을 때 그 확신을 기반으로 사고하고 대응한다. 일종의 모듈화 된 알고리즘 같은 것이다. 적어도 내가 구축한 확신대로 움직이면 조금은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고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는 이렇게 만들어진 하나의 관념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점이다.
뇌는 이제 인간의 갈등과 드라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두면 좋을 상태로 들어간다. 이제부터 모형을 만드는 사람에서 모형을 방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결함이 있는 세계 모형을 가진 결함 있는 자아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뇌는 자아를 보호하려 든다. 남들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지각하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자아가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증거를 접할 때마다 몹시 불안해질 수 있다. 이때 뇌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알아채서 우리의 신경 모형을 변형하기보다 남들의 관점을 부정할 방법을 찾는다.
<이야기의 탄생>, 윌 스토
남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쉽게 보인다. 뭐가 문제인지, 그 사람이 무얼 잘못하고 있는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그런 주인공을 보다 보면 우리는 복장이 터진다. 멱살을 잡고 때려눕혀서 엉덩이를 팡팡 쳐주고 싶은 애들이 한둘이 아니다. 자신의 어떤 성격적 결함이나 잘못된 신념으로 인해 점점 상황을 파국으로 끌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아니 저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하나”
싶은 장면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그들은 나름 어떤 문제들을 항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 문제는 그것이 ‘자신의’ 최선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믿음 안에서의 최선, 스스로 구축한 내적 모델 안에서의 최선. 그러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자신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 문제와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 순간 주인공은 지금까지 자신이 가져왔던 확신을 내려놓고 새롭게 다짐한다. 자신의 확신이라는 것이 오히려 지금까지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던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그 깨달음의 순간 앞에서 그가 세워왔던 세계에 대한 관점은 무너져 버린다.
성장 영화라면 주인공은 이 깨달음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고, 히어로물이라면 주인공은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된다.
이 각성의 시작은 그들이 구축한 세상에 대한 모형을 무너뜨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인생관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인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한 개인으로서도 어려운 일이며,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는 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신념이 가진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 번째 방법은 바로 '실패'다. 지금까지의 인생관과 그에 따른 자아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깊은 고통을 겪고 나며, 지금까지 보지 못한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뙤면 지금까지 옳고 타당하다고 여겼던 이상과 신념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고, 나아가 더 포괄적이고 생산적인 새로운 방향을 찾아 나설 것이다. “
<존엄하게 산다는 것>, 게라트 휘터
그러나 그 모든 실패가 어떤 각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인간은 자신의 실패를 재해석하여 어떻게든 합리화하는 방법을 찾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실패는 그 고통의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다. 그래서 그 고통을 허용하지 않거나, 모른 척해버리고 만다. 물론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신념이 하루아침에 모조리 충격적으로 무너지는 경우도 드물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앞으로도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한 대부분의 사람은 오히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신념을 보다 효율적이고 보다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존엄하게 산다는 것>, 게라트 휘터
그는 실패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이야기한다.
실패보다 효과적이고, 한 개인이 형성한 이상과 세계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다. 그 만남을 통해 자신의 신념과는 다른 낯선 신념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완전한 타인을 만나면서 자아상과 세계관을 확장하고 비로소 자신의 신념을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존엄하게 산다는 것>, 게라트 휘터
수많은 이야기들에서 주인공은 영광의 자리에서 어떤 심연의 공간으로 떨어진다. 더 이상 어떤 희망도 찾아볼 수 없을 거 같은 순간에서야 자신을 버리고 각성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혹은 어떤 스승을 만나서 세상과 자신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기도 한다.
루크 스타이워커는 요다를 만나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에이션트 원을 만나듯.
‘실패’와 ‘만남’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는 결국 자신이 구축한 내적 모델에 새로움을 더해주는 계기이다. 게라트 휘터는 ‘만남’을 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실패’와 ‘만남’이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형태로든 ‘실패’가 기존 모델에 균열을 가져오고 해체의 가능성을 만들어 내어야 ‘만남’을 통한 새로운 신념과 경험을 그 무너진 모델의 재구축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평균의 인간이란 누군가의 ‘말’ 정도로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어떤 실패 후에야 ‘아, 그 말이 그 뜻이었구나’라고 뒤늦게 깨닫기는 해도. (우선 우리부터가 부모님이 그렇게 말해도 안 듣고 자라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실패란 꼭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건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소스 코드의 버그를 알려주는 징후이다.
실패라는 건 우리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일종의 디버깅 툴 같은 것이다.
저렇듯 약점이 많고 인간적인 결함으로 가득 찬 주인공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이유가 있다.
남들 보기에 지겨울 만큼 질기다. 그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순간들에 한탄하듯 나왔던 탄식이, 이번에는 그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순간들에 감탄처럼 뱉어진다.
“저게 저렇게까지 할 일인가?”
우리의 주인공은 새로운 이야기를 향해 달려간다. 지금껏 자신이 원하던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짓 욕망을 버리고,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한 진정한 욕망을 찾아 나선다. 그들은 간극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새롭게 구축하고,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자신의 오류를 디버깅하는 데 정말 진심이다.
그게 그들이 주인공인 이유이다.
우리는 그런 순간들을 우리 인생에서 반복한다. 종종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느낌이다.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진다는 생각이 들 때. 그래서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수밖에.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주인공이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끔은 그런 짓을 해보는 것도 좋다.
남들 보기에 ‘저게 저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은 짓을.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이야기는 바꿀 수 있다.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리의 길고 긴 역사만이 아니다. 그 역사에 대한 이야기 또한 현재를 바꾼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모순을 해결하며,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야기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인생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해 준다. “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메리 파이퍼
<커버 사진 출처 : 사진: Unsplash의Marcus Reubenste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