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작들
자아가 일종의 스토리텔링이라는 그래서 어떤 희망의 불씨가 된다.
내가 나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 해야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 중에서 하나가 이 ‘자소설’을 고치고 수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니까.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거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다 잘 될 거라’는 류의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자소설을 미화하라는 얘기도 아니고, 나쁜 점을 덮어버리는라는 얘기도 아니다. 하지만 저것들을 돌아보고 고쳐내려 하는 것은 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추동력을 만들어준다. 어떤 신념들에 대해서는 시간을 들인 만큼, 우리는 그 정체성에 가치를 부여한다. 때로는 그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스토리를 만들고, 자신을 이입한다.
갑자기 IVE의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Life is 아름다운 galaxy
Be a writer, 장르로는 fantasy “
- IVE <I AM>
그러게 '내가 내 인생의 작가'라는 건 그저 낡은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그렇다.
흐음... 그럼 이렇게 된 김에 아예 스토리텔링을 대해서 좀 알아보자.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작가가 되겠다면 그 정도는 공부해야지.
언젠가 팔자에 없는 소설 작법과 시나리오 작법에 대해 주구장창 공부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니러니하게도, 소설 한 편 못 써 본 놈인 초보 작가들을 위한 ‘스토리텔링 비법(?)’같은 글을 써야 했다. 그런데 그 글을 쓰면서 소설 작법보다도 오히려 인생에 대해 많은 걸 떠올리게 되었다. 왜 아니겠는가. 누군가의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 곧 작법인 걸.
영화나 소설을 보다 보면 캐릭터가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는지, 왜 그런 심리를 갖게 되었는지, 그의 행동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장면들이 있다. 제대로 잘 쓴 이야기라면 악당이라고 하더라도, 그 인물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하게 만들어 주는 과거의 어떤 사건들이 있다.
애니 <진격의 거인>의 주인공 옐런 예거는 어머니가 거인에게 잡아 먹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의 삶의 목표는 “세상의 거인을 모두 죽이는 것”이다. 자기 삶의 모든 것은 이걸 위해 위한 것이 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아이유가 맡은 이지안은 이렇게 말한다.
“내 인생에 날 도와준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진 마요. 많았어요. 도와준 사람들. 반찬도 갖다 주고, 쌀도 갖다 주고,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네 번까지 하고 나면 다 도망가요. 나아질 기미가 없는 인생, 경멸하면서. 자기들이 진짜 착한 인간들인 줄 알았나 보지?”
용량이 정해져 있는 선의들은 때로는, 받는 이에게 상처를 주고 그녀는 그렇게 사람에 대한 마음을 닫는다.
누구에게나 그런 오리진 씬이 있다.
오리진 씬(Origin Secne)
인물의 성격을 구축하고 그들로 하여금 어떤 신념을 갖게 만드는 어떤 과거의 사건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보통 하나의 응축적, 상징적 사건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꼭 트라우마가 아니더라도, 인물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가지게 만드는 사건들이다
이제 주인공이 하는 선택들은 그 하나의 사건을 통해 많은 부분 설명되고, 관객들은 그 사건을 통해주인공을 이해하고 어떤 공감의 접점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의 삶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다. 소설처럼 하나의 임팩트 있는 사건이 아닐 수도 있고, 정작 우리 스스로는 그 사건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걸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혹은 무의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할 수도 있고. 그러나 그렇게 살아온 삶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 안에 스며들어 있다.
뭐랄까, 인생은 좀 그렇게 콩나물 같다. 콩나물의 길다란 줄기를 따라 물은 흘러내릴 뿐이지만, 그래도 조금씩 스며들고 배어들어서 우리를 만들어간다.
단 하나의 충격적 사건이든, 차곡차곡 켜켜히 쌓여온 경험이든 우리는 누구나 그런 사연들이 있을지 모른다. 누구에게나 그런 ‘오리진 씬’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그게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우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자신은 호의를 가지고 양보했던 것인데, 누군가 그걸 권리를 생각하고 적반하장으로 구는 경험을 당했다면, 이런 생각을 할 지도 모른다. “강해 보여야 한다. 양보해봤자 나만 손해다.” 한 번 용서해줬던 연인이 다시 바람을 피운 경험을 하게 된다면 “한 번 아니면, 아닌 거야.”라는 단호함으로 세상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그리고 우리 또한) 그 신념과 가치관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하고, 캐릭터를 구축해간다. 종종은 그렇게 살아오며 생겨난 가치관들과 신념들을 통해서 자기 존재의 근거를 그 찾기도 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남자라면 이래야만 해.’
‘나는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아. 할 말은 하는 게 나야.’
‘당한 건 꼭 갚아줘야 해. 안 그러면 다음엔 더 우습게 볼 거라고’
그렇게 한 번 형성된 신념은 이제 우리 안에서 되먹임질하며 그 성향들을 강화해간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들, 그리 적합하지 않은 것인데도 우리는 그걸 밀고 나간다. 그렇게 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온 경험이 쌓여 있으니까. 사실 다른 방법을 몰라서, 지금껏 사용해온 해결책이 그것뿐이라서 다른 방식의 유용성을 깨닫지 못해서일 수도 있는데,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다. 애초에 그런 선택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그렇게 자신만의 잘못된 신념을 하나 정도는 갖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그들이 주인공일 것이다. 결국 이야기는 그들이 잘못된 신념을 극복해가는 과정이니까. 처음에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게 옳다. 이런 식으로 하니까 지금까지 문제가 잘 해결되어왔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된다.’라고 생각한다. 그냥 살던 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생겨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회피하려 들게 마련이다. 그럴 수 밖에… 인간은 원래 보수적이고, 처음부터 크게 바뀌지 않으니까. 그러니 애써 외면하거나, 가장 작은 노력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든다.
하다 못해 보고서 한 장을 고쳐도 그렇다. 단어 몇 개를 바꿔서 어떻게 해보려 하다가, 안 되면 장표 몇장을 새로 넣어 본다. 개요 자체를 바꾸어서 새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가장 마지막에나 하게 되어 있다
자신에게 닥쳐온 어떤 갈등에 대해 주인공은 나름의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는 나름의 내적 갈등과 고민을 하고 새롭게 행동을 한다. 하지만 점점 더 갈등은 커져가기만 한다. 그러다 그런 순간들에 마주한다. 그렇게 해도 더 이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순간들. 오히려 처음에는 조금 문제가 해결되는 거 같던 문제들이 점점 더 크게 불거지는 단계.
더 이상 자신의 잘못된 신념으로 구축한 삶의 방식을 유지할 수 없을 때까지 그들은 방식을 고수한다.
“결함을 수정하려면 우선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난관에 처하면 대개 우리에게 결함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는데, 그럴 때 사람들은 우리에게 '부정'한다고 말한다. 사실이 그렇다. 그야말로 자기 자신의 결함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설사 볼 수 있다고 해도 대개는 그것을 흉이 아니라 미덕으로 여긴다.”
<이야기의 탄생>, 윌 스토
그렇다. 그들은(그리고 우리는) 어떤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
신념, 가치, r그게 무슨 이름으로 불리든 우리는 그렇게 우리 안에 새겨진 어떤 코드에 따라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일종의 어떤 확신범들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