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최소한의 '나'

by 아룬

집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푹 쓰러진다. 씻지도 않고, 저녁도 안 먹고.

뭐 딱히 힘든 하루를 보내었던 것도 아닌데 그런다. 휴대폰만 만지작만지작거린다. 숏츠 몇 개 본다던게 벌써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유용한 걸 보자 싶어서 경제 유튜브로 옮겨가 본다. 소리는 들려오는데, 막상 귀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머리를 써야 하니까, 생각하기 싫으니까.


그렇다. 에너지는 소중한 것이다. 허투루 쓰면 안 되지. 아껴야 한다. 그게 체력이든 정신력이든.

그러니 인간은 꽤나 효율적인 존재인 셈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렇다.


지금까지 깨달은 건 결국 인간은 일종의 정보처리센터라는 거다. 우리가 자라면서 습득하는 정보들을 기반으로 신경세포가 활성화되는 패턴들이 생겨나고 거기에 맞춰서 자신이 감각하는 것들의 정보를 처리하는 거다. 일종의 스키마가 생겨나고 이를 통해 정보처리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위해 일종의 자동 주행 방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필요할 때만 인지 능력을 꺼내어 추가로 사용하는 것이다.

게으른 게 아니라 효율적이다. 쓸데없이 신체적 에너지와 정신적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을 뿐이다. 누가 쫓아오지도 않는데 달리기를 하고 싶지도 않은 건 기실 당연하다. 뇌가 보기엔 낭비이니까.

사무자동화처럼 알게 모르게 나는 스스로를 ‘자아-자동화’를 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체력과 인지력을 조금이라도 덜 들이기 위해서.


생각해 보니 나는 그런 '자아-자동화' 덩어리의 집합체였을 테다. 아침만 생각해도 그렇다. 7시 알람, 스누즈 3번, 7시 30분 기상. 샤워 10분, 옷 입기 5분, 출근길도 똑같다. 같은 지하철 칸, 같은 자리, 같은 유튜브 채널, 같은 카페, 같은 메뉴. 저 정도야 습관이려니 하자. 회의에서 하는 말도 똑같다. "좋은 생각입니다.", "검토해 보겠습니다",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동 멘트들. 생각할 필요가 없다. 효율적이다.


하지만 텅 비어 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일종의 '틀'에 대한 것이었다. 뇌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고, 어떻게 정보를 처리하고, 왜 효율을 추구하는지.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진짜 궁금한 건 이거다. 그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신지.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저런 감정을 느끼고,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가. 구조를 안다고 해서 내용을 아는 건 아니다. 집의 구조를 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어떤 삶이 벌어지는지 아는 건 아니니까.


텔레비전 프로그램 <심슨 가족>이 왜 재미있는지 알고 싶다면, 텔레비전 속 트랜지스터와 축전기를 연구하는 방법으로는 별로 성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전자 부품들을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고 전기에 대해서도 한두 가지 배울 수는 있겠지만, <심슨 가족>의 유머를 이해하는 데에는 조금도 다가가지 못한다. 우리가 <심슨 가족>을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려면 반드시 트랜지스터가 온전해야 한다. 그러나 그 부품 자체가 재미있지는 않다. 비슷한 맥락에서, 정신이 뉴런의 완전성에 기대고 있기는 해도 뉴런 자체에 사고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 데이비드 이글먼
출처 : <The SImpsons>

여태 봤는데 텔레비전 속 트랜지스터를 살펴본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같은 텔레비전이라고 24시간 같은 방송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트랜지스터를 잘 안다고 방송 전문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뉴런만을 연구함으로써 지각을 이해하려 하는 것은 깃털만을 연구함으로써 새의 비행을 이해하려 하는 것과 같다. 그냥 불가능한 일이다. 새의 비행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항공역학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깃털의 구조 및 다른 날개 형태가 지니는 의미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뇌과학자, 데이비드 마

철학자, 신경과학자, 뇌과학자들이 모여서 뇌의 구조를 밝히는 건 오히려 쉬운 문제는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항공역학'을 발견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에 비하면.


“뇌" = "나”는 아니다


앞에서 한 얘기만 놓고 보면 나란 인간은 마치 고정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한 번 세팅되면 끝,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하나의 내적 모델에 의해 체력과 인지력을 아끼는 데만 신경을 쓰는 고정된 존재.

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겠지. 마치 게임 상의 NPC처럼, 마치 자판기처럼 버튼만 누르면 똑같은 반응이 나오는 사람들. 스스로는 그것이 자신의 개성이나 성격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떻게 보면 스스로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라가 아니라 내가 그랬다..)


ⓒGenerated by AI using Gemini


“난 원래 그래!”
“내 성격은 원래 이래!”


그렇게 자기주장을 하고 그게 개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해진 루틴만 반복하고 정해진 반응만 하고 정해진 생각만 하는.


‘원래’라니…


하지만, 생각해 보면 원래 그런 건 없다. 그 ‘원래’도 다양한 우연의 산물 혹은 어떤 시대와 공간의 한계 속에서 나에게 한정적으로 주어진 경험 데이터들로 인해 생겨난 것일 테다. 지역적으로는 경상도 어딘가, 시대적으로는 80~9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 올라온 지방 학생 등등의 정체성으로 겪었을 일들.


비슷한 환경 속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모두가 비슷한 삶을 살지는 않는다. 우리는 어쨌거나 인간이다. 일종의 자가 생성형 모델이다.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건 결국 그런 것에서 차이가 나는 게 아닐까.


‘뇌’의 구조와 기능 자체가 바로 ‘나’인 것은 아니다. 심지어 ‘나’는 그 ‘뇌’라는 녀석을 인지하지도 모르고 잘만 살아간다. 지금은 ‘뇌’라는 게 뭔지 연구라도 하지만 천 년쯤 전에 태어났더라면 이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생물학적인 ‘뇌의 구조’보다는 ‘그 안에서 구동되고 있는 무언가’가 어쩌면 ‘나’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AI프로그램을 돌린다고 해서 나의 맥북이 그 자체로 AI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일 테다. 나의 ‘뇌’라고 하더라도 그저 뇌의 구조와 기능 자체가 바로 ‘나’인 것은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무언가를 느끼고 그것에 대해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식의 흐름을 통해 나는 ‘나’를 지각할 것이다. 그건 딱히 어떤 고도의 지능 같은 걸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뇌로 들어오는 감각 정보의 흐름을 처리하는 것, 그것이 최소한의 자아... 어떤 생명체에게도 첫 번째이자 가장 기본적인 과제는 나란 존재가 세계에 무엇을 하는지와 세계가 나란 존재에게 무엇을 하는지를 구별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최소한의 자아'라고 부르는데, 이는 움직임이 나에 의해 수행되며, 경험이 내 것이라는 느낌이다.”

<나라는 착각>, 그레고리 번스


어쩌면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이런 의미에서 ‘최소한의 자아’인 나에 대한 느낌 정도를 느끼게 해주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조금은 고등의 동물적 자아 수준이랄까. 의식을 하고 생각이라는 걸 하는 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 번 더 나아가야 한다. 자아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뇌’와 ‘나’ 사이에는 또 다른 연결점이 필요하다. 데이터센터가 만들어지고 회선이 깔렸다고 하더라도 결국 작동을 하려면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Generated by AI using Sora

신경전달물질이 전기라고 치면, 그 전기를 통해서 오가는 데이터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것들이 의식의 영역으로 떠올라서 내가 그것을 인지하고 이름 붙이고 나의 의지로 드러내고 행동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필요한 그 무언가 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태초의 호모 사피엔스가 ‘나’였다면 나는 어떤 모양으로 무얼 하고 있었을까? 진화론적으로야 지금의 나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뇌용량도 비슷하겠지,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학습하기도 했을 것이다. 뇌 크기가 충분하니 생각이라는 건 했겠지.


하지만, 이때의 생각이 지금의 생각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갸갸갸갸'나 손짓발짓으로 지금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럼, '뭐'가 더 필요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