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이야기

by 아룬

10만 년 전의 내가 일기를 썼다면 이렇게 썼을지도 모르겠다.


“해가 지는 광야에서. 다가오는 어스름 속으로 울려 퍼지는 들짐승의 울음소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먼 곳의 두려움이지만 주린 배와 마른 목은 내 안의 두려움이었다. 며칠 째 나와 비슷한 인간은 단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다. 두려운 것은 오히려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10만 년 전의 나는 저런 걸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저런 걸 '쓸'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저기에 적은 것처럼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고, 조금 더 나아가 공포를 느끼고 슬퍼하고 화를 낼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저 글을 쓰듯 생각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느낌과 심상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체험하기는 하겠지만, 이것을 생각,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의 사유로 구조화하고 체계화하기 위해서는 결국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렇다. 지금 ‘이 글을 쓰듯’ 필요한 것.

바로 ‘언어’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조차도 ‘생각하는’ 나는 ‘Cogito Ergo Sum’이라는 언어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한다.


결국 생각은 언어로 이루어진다. 언어가 없었다면, 나의 뇌는 고사양 맥북을 사놓고 인터넷이나 하는 신세(아니 인터넷도 못하고 메모장이나 쓰고 있었겠지)나 마찬가지가 되었을 것이다. 인터넷이나 하는데 고사양 맥북이 필요하지는 않은 것처럼, 애초에 언어가 없었다면, 인간의 뇌는 이렇게까지 커질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말은 왜 하고 싶었던 걸까?


애초에 언어라는 건 왜 생겨 났을까. 의사소통이나 정보 전달이라는 건 어떻게 생겨났을까?


'운수 좋은 날'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누군가 운이 좋았는지 큰 사슴을 세 마리나 잡아서 왔다고 해보자. 그들은 자신들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싶을 것이다.


“오늘 내가 말이야, 어떻게 세 마리나 잡았는지 알아? 저놈이 쩌어어어기서부터 슬금슬금 오더란 말이지. 내가 그래서 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그는 그렇게 자신이 어떻게 사슴을 잡았는지 열심히 이야기할 테다. 이건 결국 ‘어떤 인물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본인이 어떻게 사슴이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갔는지를 흥미진진하게 묘사할 수도 있을 테다. 스스로에 대한 자랑이자, 어떻게 보면 자기보다 어린 연배들을 위한 사냥법 강의이기도 한. 요즘이라면 자기 블로그에 쓸 만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체득하고 느끼지 않았을까. “나는 타고난 사냥꾼”. “후배들에게 사냥 방법을 알려주는 훌륭한 스승” 뭐 이런 식의.



자아라는 것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 스스로를 묘사하면서 자신을 규정짓는 것. 생각해 보니 결국 그게 인간이 하는 일이다. 하다 못해 그게 자기 합리화에 가득한 허세라고 하더라도. 그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규정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존재다.


'이 순간의 당신이 어제와 자아나 어린 시절의 자아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답은 서사에 있다. 서사는 일련의 사건들을 연결한다. 당신의 서사는 당신의 삶,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이를 '서사적 자아'라고 부른다. 모든 동물이 최소한의 자아감을 가지고 있지만, 이야기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인간만이 '서사적 자아 narratic self'를 갖고 있다.

<나라는 착각>, 그레고리 번스


이렇게 만들어 낸 서사들이 우리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나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다. 그렇게 스스로를 규정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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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집해서) 이야기한다, 나에게


그러니 우리를 구성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를 묘사하는 일종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종종 그런 어르신들을 만난다. “내 얘기만 써도 소설 한 편은 나온다.” 하나의 인생은 그렇게 하나의 서사를 만든다. 우리는 그렇게 제각각 자신에 대한 서사를 만든다. 일종의 서사적 자아다. 다만 이 기억들은 또 제각각의 관점과 스키마에 따라 편집되어 있을 것이다


과거-현재-미래를 엮는 것은 결국 하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이런이런 삶을 살았고, 지금 이런 경험을 하고 있고 그래서 이렇게 될 거라고, 혹은 이렇게 할 거라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나’. 그 정체성에 기반하여 우리의 알고리즘은 작동한다. “이러는 게 나 다워.”r.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여기서 문제의 '당신'은 당신이 된다는 경험을 집합적으로 구성하는 자기 관련 사전 신념, 가치관, 목표, 기억, 지각적 최선의 추측 모음이다. 이제 의지의 경험 자체는 자아 집합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즉, 의지의 경험은 자기 관련 제어된, 또는 제어하는 환각의 일종이다. “

<내가 된다는 것>, 아닐 세스


문제는 저런 모음들이 언제나 일관되지 않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내 인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소설이다”라던 말. 하지만 그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촘촘히 나열한다고 해서 소설이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냥 지루한 어떤 사건들의 나열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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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 때로는 내가 원하는 정체성에 맞추기 위해 필요한 사실들을 추려내고 편집해서 어떤 정체성을 만들어 낸다. 수많은 사건 중에서 내가 원하는 부분 만을 편집해서 이어 붙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그때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하며 스스로를 소환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자기소개서가 다들 한 편씩 있는 셈이다.
취업용 자소서만큼이나 편집이 가득한 ‘자소설’이기도 하다.

그 안에는 어떤 자기 합리화와 어떤 자기 비하가 범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큰 줄기는 다르지 않지만, 지원하는 회사에 따라 조금씩 각색을 하듯. 상황과 맡은 역할에 따라 조금씩 각색하고 새로운 나를 창조해내기도 한다.


‘나’라는 자아는 일종의 스토리텔링이라는 것.

어쩌면 인간의 희망은 그런 곳에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언제든 다시 쓸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