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커피는 남자가 타야 맛있지
직장생활의 9할 이상을 이른바 ‘여초 조직’에서 보내왔다. 흔히 여성은 남초 조직에서도 잘 적응하지만, 남성은 그 반대 상황에서 고전한다는 속설이 있다. 나 역시 그 통계적 수치의 예외는 아니었다.
30대 중반,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따고 첫 번째 전직의 문을 두드렸다. 이 분야에서 남성을 찾는 일은 가뭄에 콩 나듯 귀한 일이다. 센터에 배치받은 첫날, 나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와, 이렇게 따뜻한 곳이라니!”라는 감탄이 무너지는 데는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내가 환영받은 이유는 단 하나, 이제 남자 화장실을 청소할 사람이 왔기 때문이었다. 각종 청소 도구가 남자 화장실에 몰려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까지 더해져, 나는 출근 첫날부터 소중한 동료보다는 ‘맞춤형 청소부’의 정체성을 부여받으며 이곳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곳에는 본사로부터 특별 관리 지령이라도 받은 듯, 나를 향해 날 선 언행을 쏟아내는 강력한 캐릭터의 리더가 있었다. 그녀가 던진 환영 멘트는 환영이라기보다 선전포고에 가까웠다.
“젊은 남자가 뭐가 되려고 이런 일을 할까?”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이었다. 이 분야를 선택한 내 결정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내 외양이나 캐릭터가 사회통념상의 남성성과 거리가 멀다는 뜻인지 알 길 없었다. 초면에 던진 말치고는 지나치게 무례했고, 무엇보다 당혹스러웠던 건 그녀의 태도였다.
본인 스스로 이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팀장이라는 자리에 올랐으면서, 정작 자신이 종사하는 업(業)을 그토록 쉽게 폄하하다니. '이런 일'이라니. 나는 정말 시작부터 전직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일까? 확신이 흔들리며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고민에 잠길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제부터 나라는 과녁을 향해 쏟아질 인격 모독의 화살들을 어떻게든 견뎌내는 것, 그것이 당장 내게 주어진 가장 가혹한 미션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에도 남자 하나 왔는데, 1년도 못 버티더라고요.”
너 역시 안 봐도 뻔하다는 예언이자, 버텨낸다면 본인의 손으로 기어코 좌절시키겠다는 서늘한 의지처럼 들렸다.
“남자라고 해서 이뻐해 주거나 특별 대우해 줄 거란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이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업무 중이던 직원들 사이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메인 멜로디에 코러스를 쌓듯 울려 퍼지는 그 웃음에서 나는 거대한 텃세를 느꼈다. 성적 수치심이란 이런 걸까. 나는 남자라는 이유로 군림하고 싶지도, 이성적인 관계를 꿈꾸지도 않았다. 그저 동료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리더는 나를 ‘잠재적으로 성적 우위에 서고 싶어 하는 몰지각한 수컷’으로 치부해 버렸다. 모멸감이 차올랐다.
그날의 화룡점정은 팀장의 마지막 명령이었다. “형석 씨, 커피 한 잔씩 좀 부탁드릴게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모욕적인 OJT를 견디는 것보다 차라리 명확한 임무를 수행하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탕비실에는 노란색 믹스커피와 냉온수기가 놓여 있었다. 나름 믹스커피에는 자신 있었다. 물 100ml 정도만 눈대중으로 맞출 줄 알면 실패할 일 없는 황금 비율.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녀는 과장스럽게 눈을 부릅뜨며 주변 사람들이 다 들리게 외쳤다.
“역시! 커피는 남자가 타야 맛있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문장이었지만, 그 대상이 내가 되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기분 나빴던 건 커피 심부름 자체가 아니었다. 누구든 먼저 준비해 대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감사한 일이다. 내가 주목한 건 그녀가 굳이 ‘남자’라는 단어를 선택한 의도였다.
여전히 많은 직장에서 커피를 타는 성별이 고착화되어 있다. 그녀 역시 과거에 여성이기에 당연히 커피를 준비해야 했던 불합리한 상황을 숱하게 마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이상적인 태도는 ‘남에게 시키기보다 내가 먼저 준비하는 다짐’이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직장을 과거 자신이 당했던 수모를 되갚아주는 복수극의 무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상급자에게 받은 압박이 있었다면 그 당사자에게 사과를 요구하거나 슬기롭게 풀어냈어야 한다.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나를 복수의 대리물로 삼았다는 사실에 깊은 실망감이 들었다.
전임자가 1년을 못 버텼다고 했던가. 나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지만, 그 오기 덕분에 결심했다. 나도 딱 1년만 버텨보자고.
하지만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 비하면, 이 ‘남자 커피’ 사건은 그저 귀여운 애교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