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공과 둥근 방망이, 그 말도 안 되는 사랑에 대하여
이게 얼마 만에 마주하는 아침 야구인가. 직장 생활이 궤도에 오르고 일상의 무게가 무거워지면서, 한때 내 새벽을 깨우던 MLB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응원하는 보스턴 레드삭스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우승 가시권에 들 때나 겨우 챙겨보는 정도. 결혼과 육아라는 현실의 파도가 덮치면서 '아침 야구'는 내 일상에서 점차 지워진 단어가 되었다.
그런데 무려 17년 만의 WBC 미국 무대 진출이라니. 이전 경기인 호주전을 극적으로 잡아내며 얻어낸 이 감동적인 선물 덕분에, 나는 잊고 지냈던 아침 야구의 설레임을 다시 꺼내 들었다. 물론 걱정이 앞섰다.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단 며칠 만에 시차를 극복하고 정상적인 경기를 치르는 것이 가능할까. 냉정하게 말해 불가능에 가깝다.
상대는 세계 최강 도미니카 공화국. 조국의 왕좌 탈환을 위해 모인 '야구 괴물'들이다. 특유의 민족적 기질 덕분인지, 그들은 WBC 무대에만 서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120%의 에너지를 쏟아낸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나 선수 구성으로나 몇 수 아래인 우리 대표팀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거운 상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은 둥글다. 모든 구기 종목이 변수를 품고 있지만, 야구는 그 변수의 밀도가 유독 높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은 공만 둥근 게 아니라 그 공을 맞히는 배트마저 둥글다는 점이다. 둥근 것과 둥근 것이 만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방향을 만들어내는 이 말도 안 되는 공놀이. 그래서 한 번 빠지면 대책이 없다. 통계적으로도 최약체가 최강팀을 상대로 열 번 싸워 서너 번은 이길 수 있는 종목이기에, 우리는 도미니카라는 거함 앞에서도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주말 아침,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티비 앞에 앉는 이유도 바로 그 30%의 기적 때문이다.
어젯밤, 영화관 응원전 티켓팅을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 가족과 거실 소파에 앉기로 결정했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어쩌면 오늘이 이번 대회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하지만 합리적인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우리에게 단 한 뼘의 미소도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의 선발은 류현진. KBO를 평정하고 메이저리그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 명실상부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다. 그런 그가 어느덧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다시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었다. 국내 무대에서도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 그가, 가장 난도가 높은 경기에 선발로 나서는 모습을 보며 나는 '라스트 댄스'의 해피엔딩을 꿈꿨다.
화면 속, 선수들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입장하는 화려한 순간에도 선발 투수 류현진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불펜의 적막 속에서 묵묵히 혼자 몸을 풀고 있었다. 선발 투수만이 짊어지는 깊은 고독과 침묵의 시간. 대한민국의 영웅이 홀로 감내하고 있을 그 외로움이 화면 너머로 전해질 때 목이 메었다. 후배들이 그를 얼마나 도와줄 수 있을까. 그 고독의 깊이를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응원을 넘어선 경외심마저 들었다.
경기는 시작되었고, 허무하게 끝났다.
7회 초, 10대 0 콜드 게임.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못 해보고 무너질 줄은 몰랐다. 허탈함이 몰려오는 순간, 문득 내가 야구라는 친구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1989년의 잠실 야구장이 떠올랐다. MBC 청룡과 태평양 돌핀스의 영화 같았던 경기.
흔히 '최애'는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고 한다. 어느 날 예고 없이 다가와 "오늘부터 내가 너의 최애야"라고 선언하면,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 같은 것. 내게 야구는, 그리고 이듬해 LG 트윈스가 된 그 팀은 그렇게 운명이 되었다.
나는 뮤지컬과 연극을 사랑한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본진' 배우도 있다. 그들은 내게 좋은 친구 같은 존재다. 하지만 야구는 다르다. 야구는 내게 가족이다. 뮤지컬 작품은 바뀔 수 있고, 좋아하는 배우는 늘어날 수 있는 유연함이 있지만, 야구와 '문제의 그 팀'은 바꿀 수 없는 천륜과 같다.
자궁 밖을 나와 세상의 빛을 본 순간 맺어진 부모 자식 관계를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 옆집 부모님이 더 부자라고, 나에게 더 잘해준다고 해서 내 부모가 바뀔 수 없듯이, 야구와 LG 트윈스는 내게 그런 존재다. 바꾸고 싶은 마음도 없거니와,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지독한 관계.
누군가는 그깟 공놀이에 왜 가족까지 들먹이며 의미를 부여하느냐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상에서 이토록 애정을 쏟을 대상이 있다는 것, 희로애락을 오감으로 겪으며 매일 울고 웃고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오늘처럼 형편없이 패배하고 나면 야구에 정나미가 떨어질 법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가족이기에, 언젠가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현실을 초월해 응원하는 것이다. 결과가 참담해도 괜찮다. 그저 우리 가족이 함께 마음을 나누고,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하니까.
방심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준 도미니카 선수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들의 압도적인 실력을 통해 역설적으로 야구라는 종목이 주는 거대한 감동을 다시 확인했다.
우리 선수들은 단 한 점도 내지 못한 채 9회도 버티지 못하고 돌아오지만, 나는 기꺼이 박수를 보낼 것이다. 다만 이 참담함을 선수들이 평생 기억하기를 바란다. 국내 리그로 돌아와 경기장을 가득 메워줄 팬들의 사랑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그 열광 뒤에는 이토록 지독한 '가족의 마음'이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원래 가장 가까운 가족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당신들의 엉망진창인 모습까지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으면서도, 차마 등을 돌리지 못한 채 내일 또다시 야구장으로 향할 우리 같은 바보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오늘 아침, 비록 승리는 없었지만 나는 다시금 확인했다. 내 인생의 가장 뜨거운 응원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