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몰입이라는 축복: 일상의 문을 여는 가장 뜨거운 방법
최근 영화 <햄넷>과 <매드 댄스 오피스>를 연달아 만나며 기분 좋은 ‘과몰입’에 빠졌다. 시작은 주변의 극찬이 쏟아진 <햄넷>이었다. 미루고 미루다 상영관이 다 내려갈 즈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소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들을 픽업해야 하는 일과 시간 사이, 상영관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찾은 극장에서 시간대가 맞아 대신 선택한 영화는 <매드 댄스 오피스>. ‘염혜란 배우니까’라는 믿음 하나로 티켓팅을 했는데, 웬걸. 영화가 너무 좋은 게 아닌가. 그 여운을 안고 다음 날 아내의 귀한 허락을 얻어 저녁 시간 <햄넷>까지 볼 수 있었다. 이 두 편의 영화는 내게 순식간에 씨네필의 영혼을 선사했다. 며칠째 감당하기 어려운 감동 속에서 허우적대며, 주변인들이 각자의 언어 능력을 총동원해 쏟아내는 찬란한 감상평들을 목격하는 중이다. 바야흐로 기분 좋은 과몰입의 시대다.
흔히 ‘지나친 것은 부족함만 못하다’고들 한다. 나 역시 그것을 100%의 진리라 믿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끔은 이 과몰입이 주는 축복에 가까운 전율이 참 좋다. 오히려 무언가에 흠뻑 젖어들 수 있는 감수성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과몰입하는 나 자신에게 행복을 느끼기까지 한다.
내가 발견한 과몰입의 세 가지 유익은 다음과 같다.
직장, 가정 등 우리가 머무는 곳의 풍경은 대개 반복적이고 무채색이다. 분명 그 안에서도 성장은 일어나고 있겠지만, 매일 똑같이 돌아가는 루틴은 종종 우리를 숨 막히게 한다. 이때 영화나 공연에 과몰입하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일상의 창문이 활짝 열린다.
단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빛과 신선한 공기가 얼굴에 끼친다. “아, 나 숨 쉬고 있었지?”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아를 감각하는 순간이다. 이건 일종의 창조적 체험이다. 호흡 없던 무기물 같은 일상에 생명력이 깃들어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찰나. 화면 속 이야기는 나를 다시금 ‘살아있게’ 만든다.
내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인지 몰랐다. 눈물이라는 것에 대한 지금까지의 관념이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슬플때, 뭔가를 상실했을 때, 내가 철저히 무시당했을 때, 외로울 때나 나오는 게 눈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내겐 눈물은 극히 부정적인 상황을 증명해주는 명확한 증거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야기에 깊이 몰입하며 깨달았다. 눈물은 오직 슬플 때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날, 배우들의 폭발적인 가창력과 웅장한 합창을 듣다 소름과 함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전혀 슬픈 대목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너무 좋아도 눈물이 나는구나.'
이 마음이 든 이후로는 공연장이나 영화관에서 눈물이 나오면 애써 눌러 참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계속 흐를 눈물이라면 그냥 흘러서 떨어지게 두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가볍고 상쾌해졌다. 부끄럽고 서글펐던 일상의 내가 짊어진 짐이 조금은 부담이 덜해지게 되었다. 이야기속 인물들도 저렇게 부딪혀서 극복하고 노력하는데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같이 살아났다. 어찌하지 못해서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삶이 충분히 해볼만한 한 상대로 느껴지게 됐다. 비현실인 이야기가 현실의 나를 한껏 끌어올려주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듣거나 봤을때 과몰입이 일어났다는 것은 이 넓은 세상위에 누군가 몇 명 쯤은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몰입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한 것은 정말 반가운 기분이다. 그 사람과 함께 나누는 한 마디, 공감을 공유하는 댓글 하나가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수 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구나!'
더이상 외롭지 않다. 내 지나친 감동이 더이상 부끄럽지 않다. 분명히 이야기에 집중할 땐 세상을 다 가진것 같은 기쁨 가운데 있었는데, 어두운 극장을 나서 현실의 빛이 나를 둘러싸면 알 수 없는 고독에 휩싸이는 경험도 많이 했다. '그래, 이야기는 이야기고 현실은 현실이지' 하며 체념하고 만다.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자. 그리고 요즘 SNS 알고리즘이 얼마나 강력한가?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는 얼마든지 손쉽게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과몰입러는 ‘영혼을 담은 영업사원’이다. 대가 없는 진심으로 주변에 나의 이야기를 전파한다. 업무로 하는 영업은 고되지만, 내가 과몰입한 것을 알리는 영업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신이 나서 한다. 기업들이여, 진정한 마케팅을 원하는가? 이토록 진심과 영혼을 다해 몰입하는 사람들을 주목하라. 우리는 좋아서 하는 일엔 물불 가리지 않는 최고의 홍보 전문가들이니까.
물론 과몰입이 너무 깊어 일상을 침범하면 곤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몰입의 끝까지 가본 사람만이 적절한 지점에서 맺고 끊는 법도 아는 법이다. 적절한 과몰입은 오늘을 버티게 하는 지혜로운 동력이 된다.
그러니 오늘도 기꺼이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겨보자. 무언가에 푹 빠질 수 있는 당신은 여전히 뜨거운 심장을 가진 행복한 사람이다. 과몰입의 힘을 믿으라. 그리고 그 상태를 마음껏 즐기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