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세 살 된 아이를 잃어버리고 자신들의 인생을 모두 포기하고 아이를 찾는 일에 몰두하는 부모가 있다. 서로를 탓하기도 하며 직장을 잃고 집을 잃고 건강을 잃고 자신들의 인생을 잃으면서 십 여 년간 아이를 찾는 중 아이가 기적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아이는 납치범을 자신의 엄마로 생각한다. 자살한 납치범 엄마와 십 여 년간 아이를 잃은 슬픔으로 생긴 조현병으로 죽는 생모의 두 죽음 앞에서 아이는 십여년간 자신을 키워준 납치범 엄마를 그리워한다.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까? 그러나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십 여년간 자신을 키워준 사람을 고마워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하고 엄마가 갑자기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상황에 가장 힘들고 혼돈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아이만 나타난다면 모든 것이 마법처럼 다 해결되고 자신들을 원상태로 돌려줄 것이라는 희망과는 다른 상황에 당황스럽기는 친부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모든 비극을 만든 납치범은 나타나지도 않고 죗값을 치르지도 않고 사라졌다.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은 원인이 없다. 내가 나쁜 짓을 했기에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착한 일을 했기에 좋은 일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마트에 가지 않았더라면 ' 후회해도 소용 없는 일이다. 인생은 비극적 아이러니 같다. 부조리하고 불가피적이다. 만약 아이를 잃어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나도 저들과 마찬가지로 찾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아이를 찾는 일에 몰두하지 않았을까? 죄책감으로 나의 인생은 망가져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죄책감을 갖을 사람은 유괴범이다. 인생이 망가져야 할 사람은 그 가족들이 아니다.
김영하 작가는 세월호 사건을 생각하며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미 지옥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완벽한 회복은 불가능한 것이고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 가능하다고 한다.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지나 하루에 수십번도 더 생각했을 부모들의 마음에 먹먹하다. 남의 불행을 소비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 무너지는 일을 얼마나 많이 겪었을까.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버틴 그들의 가슴은 얼마나 많은 구멍이 뚫렸을까.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지금 버티고 있다. 그들이 아이의 시신을 찾는다고 원인을 규명한다고 해도 그들은 원래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사실이 너무나 아프고 안타깝다.
아이를 잃은 세상 모든 부모들에게 보내는 편지
저도 엄마의 죽음이 모두 제 탓인 것 같아 괴로웠습니다. 일찍 건강을 챙겨드렸더라면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 후회를 하고 또 했습니다. 먹는 것조차 죄스럽고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기도 소리도 죄스러웠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부모를 잃은 슬픔보다 더 크다고. 내리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네, 솔직히 말하면 저도 자식의 죽음을 상상한다면 더 괴로울 거라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저의 슬픔과 비교한다는 것은 죄송스런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슬픔을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생각도 듭니다. 오늘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글귀를 보았습니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틋함, 저녁놀의 아름다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삶의 의미를 구성하려는 노력이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었다고요. 인생은 내가 만들고 노력한 것이 아닌 우연, 운명, 행운, 불운의 연속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은 사치도 아니라 죄스러운 행동도 아니고 다행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감히 말해봅니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미련, 고통보다는 기억해주는 선한 노력을 통해 조금씩 잊혀진 우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위로합니다. 부디 힘내십시오. 용서하십시오. 저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