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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Jan 14. 2024

여행하는 여성들

2023년 7월 29일 토요일 2시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폭염이라는 재난 문자 메시지가 뜨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지하철에서 벗어나 지상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오르자 숨 막히는 공기와 함께 뜨거운 함성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기에 이 날씨에 시위를 하는 것일까 호기심을 가지고 뜨거운 목소리에 주목한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에 휩쓸리는 듯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청량한 공기는 호기심을 사그라뜨리고 나의 개인적 일상에 집중하게 만든다.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고 화려한 볼거리에 정신을 팔리며 시원한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참는다. 그녀의 차가 도착하는  12번 출구로 나가 택시 행렬 맨 앞에 섰다. 그녀가 나에게 흔드는 손을 보자 오늘의 데이트에 대한 행복감이 시작된다. 그녀의 남편에게 감사의 인사를 나눈 후 이제 둘만의 시간이 되었다.


처음 가는 곳은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이다. 서울역 플랫폼의 사람들은 열차를 타기 위해 분주하게 계단을 오르고 우리는 거대한 무덤 속을 연상시키는 성지 박물관을 보기 위해 계단을 내려간다. 자주 온 서울역이라는 장소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이 낯설었다. 그 많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소수의 사람만 남았다. 마치 성지 순례를 하는 사람의 마음이 된다. 순례자를 표현한 동상과 미술품을 보면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개신교를 믿고 나는 천주교를 믿지만 신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한 그녀의 배려로 우리는 이곳에 오게 되었다. 종교 이야기, 예술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최근 읽은 <데미안>이 마음에 남은 탓에 <sleeping face> 동영상 속에서 남자와 여자 두 얼굴을 가진 데미안을 떠올린다. 우리는 모두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젊음과 늙음 대비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여자에게 남자 같다는 말, 남자에게 여자 같다는 말은 실례인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선입견이고 나의 좁은 세계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는 오히려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는 작품을 전시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새로운 구상을 떠올리는 듯하다. 세네갈에서 온 건강한 미소를 가진 외국인과 아주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다시 우리의 감상으로 이어진다. 애국심 교육을 받은 세대답게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선조에 대한 존경심이 자연스레 퍼진다. 부모가 없는 고아인 우리를 닮은 듯한 이곳은 언제까지나 그녀를 떠올리게 할 장소가 될 것이다.


우리는 무더위 속에 덥지 않다는 최면을 거는 말을 주고받으며 두꺼운 선글라스를 쓰고 도로 한복판을 걷는다. 작열하는 태양과 함께 목청껏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매미 소리는 나에게 여름의 소리라는 새로운 감각을 가르친다. 나는 공기 속에도 열정적인 소리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 귀가 먹먹하여 그녀의 목소리를 놓치기도 했다. 독립책방 < 1489>에 도착하자마자 책의 냄새가 더위를 식혀주었다. 인테리어가 좋은 것인지, 책이 많아서 좋은 것인지, 더위를 피해 좋은 것인지, 그녀가 옆에 있어 좋은 것인지 나는 조용히 흥분했다. 대형 서점 말고 이 책방에서만 만날 수 있는 책을 찾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꼼꼼히 책들을 둘러보았다. 그녀와 같이 낭독을 한 안톤체호프의 책이 보였다. 벚꽃동산은 아니지만 그 시간을 충분히 생각나게 하는 귀한 책이다. 그녀는 나에게 책을 선물하겠다며 계산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작가라며 입고를 어떻게 하는지 실례가 되는 듯, 실례가 되지 않는 듯 어정쩡한 태도로 아줌마스러운 너스레를 떨고 명함을 받았다. 같이 책을 입고하면 얼마나 좋을까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다시 열기 가득한 도시 길을 걷는다. 커피도 마시면 안 될 정도로 꽉 찬 일정이다. 약현성당은 나무의 숨결이 느껴지는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곳이었다. 운 좋게 문을 열고 들어가 잠시 착석한 후 짧은 기도를 드리고 글라스의 은은한 빛을 눈에 담았다. 다시 매미가 울부짖는 나무가 우거진 길을 걸었다. 성지 박물관을 돌아보고 성당을 간다는 코스를 짠 그녀의 재치는 놀랍다. 나를 위한 여행이라는 생각에 고마움을 나답게 소극적으로 표현한다. 떠들썩 웃으며 손뼉을 치고 깡충깡충 뛰며 그녀를 껴안고 뱅뱅 돌리고 싶은 마음을 참는다. 사회적 이미지와 육체적 한계를 핑계로 나의 성격으로 숨어버린다.


우리는 드디어 목을 축일 시간이다. 런닝맨이 왔었던 맛집 <서울 부티크>에서 피자와 맥주를 먹고 마셨다. 비건이지만 햄냄새가 살짝 나는 피자를 한 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유난 떨지 말자는 마음으로 맛있게 먹었다. 더위로 갈라진 목에 들어간 맥주는 시원하게 피로를 날려주었다. 조금도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시간이 흐르고 있었기에 그저 시간의 피로이다. 그녀는 질문이 많다. 첫 책을 준비하는 마음이 얼마나 긴장되고 기대되겠는가. 시끄러운 젊은 분위기 속에 저절로  목소리가 커진 시간이었다. 그녀의 책은 독자의 입장에서도 무척 기대가 된다. 그리고 독립출판의 가능성도 열어 둔 그녀이기에 많이 도움을 주고 싶다. 우리는 다시 소설 이야기에 빠진다.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드디어 우리의 진짜 마음속의 감정을 드러난다.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살짝 그녀의 재능에 질투심도 나지만 우리는 서로 격려하며 좋은 작가가 되고 싶다. 고아라는 슬픔을 가진 그녀와 나만이 아는 세계가 있다. 유일하게 그녀의 말만 위로가 된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젊은 시간에서 빠져나와 카페 <더 테라스 1932>로 향했다. 더 사적인 대화, 남편, 아들 이야기도 나누고 커피찌꺼기가 얼굴에 묻은 줄도 모른 채 소녀처럼 웃었다. 나는 그녀의 웃음만큼 유쾌한 솔직함,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성실함, 속 깊은 지혜가 참 좋다. 그리고 사람 냄새나는 감성과 제스처도 좋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짧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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