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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Dec 28. 2023

"도둑맞은 가난"을 읽고

가난을 소비하는 시대

공장 직공 상훈이는 공장 앞에서 파는 풀빵을 하얀 종이 냅킨에 싸서 먹고, 다 먹고 나서는 그 냅킨으로 입을 닦는다. 배가 고파 허겁지겁 풀빵을 먹는 나에게 목메지 않느냐며 차를 한잔 사줄까 묻는다. 나는 상훈이가 자신과 달라 끌린다. 이질적이라 매력적이지만 가끔 아니꼽우면서 불안감도 느낀다. 여기저기 상훈이에게 느끼는 이질적인 감정이 사건의 복선을 깐다.


동거를 하는 상훈이는 찌개 속의 멸치를 싫어한다. 멸치가 눈을 뜨고 죽어서 그 눈깔이 징그럽다는 것이다. 나는 아예 멸치 대가리를 일부러 따서 자근자근 씹는다. 만식이가 공장에서 피를 토할 때 주인이 일당만 챙겨주며 집으로 데려다주라고 호통을 칠 때도 상훈이는 아둔하고 맹추스럽게 대들지도 못하고 그저 집에만 데려다주었다. 다음 날 만식이에게 병문안 갈 때 십시일반 돈을 모으라고 가르치며 둘의 전재산 삼만 원이 든 예금통장을 주었는데 상훈이는 그 돈을 몽땅 만식이에게 주었다. 너 부자냐며 악을 쓰는 나에게 그저 웃기만 하고 편하게 잠든다. 그러나 그날 이후 상훈이는 만식이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하루하루 편히 사는 것이다. 이 동네에서 볼 수 없는 캐릭터이다. 가난뱅이답지 않은 수려한 이목구비는 백치스러워 보이고 가난뱅이들의 억척스럽고 모진 구석이 없다.


세상에나, 상훈이는 가난뱅이가 아니었다. 부잣집 대학생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이 너무 고생을 모르고 자라는 걸 걱정하셔서 가난을 체험하러 공장에서 방학 동안 일한 것이다. 그리고 연탄 한 장을 아끼자고 남자와 체온을 나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훈계를 한다. 나는 그에게서 떳떳하게 지킨 가난을 빼앗겼다.


소설의 반전을 제대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복선이 느껴지는 장치가 많아 어떤 사연일까 궁금해하며 읽게 만든다. "나"의 가족은 중산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는데 가난하게 되자 그 가난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동반 자살을 한다. 그러나 "나"는 가난을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식이를 돌봐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렇고 오로지 연탄 한 장 때문에 상훈이와 동거를 한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감정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난을 무슨 질병처럼 여긴다. 억척스러움을 경멸하기도 한다. 가난의 당당함, 가난을 온몸으로 맞서는 용기는 보지 못한다. 그리고 이제는 가난을 소비하려고도 한다. 이 사실이 충격적이다. 그러나 수잔 손택이 말했듯이 우리는 이미 가난을 소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을 가서 여행하는 것이 그들을 돕는 일이라며 기꺼이 지갑을 열고 동정의 눈물을 흘린다. 더 이상 유니세프의 아이들의 모습에 마음 아프지도 않다. 상훈이처럼 돈을 주고 마음 편히 잠을 청할 수 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 말은 진실이 아닌 듯하다. 도둑맞은 가난, 이제 "나"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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