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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Jan 01. 2024

"경청"을 읽고

말의 본성

말은 진실을 전달할 수 있을까?


우리는 글을 읽는다. 뉴스를 읽고 문서를 읽고 책을 읽어 정보를 이해한다. 누군가 보낸 사적인 글을 읽기도 한다.

우리는 글을 쓴다. 보고서를 작성하고 일기를 쓰고 문자를 보내고 톡을 한다. 그러나 기호임에 불과한 글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글은 우리에게 경고한다. 글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은 살아있다. 말에는 보이지 않는 감정이 숨어있다. 그 감정은 닿는 사람에 따라, 온도와 습도에 따라 수천 가지 의미로 변한다. 말은 늘 혼자가 아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분위기가 어떤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렇게 살아있는 말로 진실을 담을 수 있을까? 말은 숨기도 하고 달아나기도 하고 다른 모양으로 바뀌기도 하는데 어떻게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근본적으로 말은 왜 이렇게 예민한 것일까? 말이 잡아내려는 진실이 너무나 예민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진실은 진실일 수도 있고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말은 우리에게 진실을 찾아보라고 모양을 바꾸는 것이다. 이런 면도 보여주고 저런 면도 보여주면서 생각하고 느끼기를 바란다. 그리고 말이 예민한 이유는 말은 청자와 화자 두 가지를 동시에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화자는 화자만을 생각할 뿐 청자를 생각한 말을 한 적이 없다. 내가 느낀 감정에 충실한 단어와 어휘를 골라 문장을 만들지만 청자는 그 속에서 달라진 문장으로 듣는다.


소설 <경청>에서는 아주 극적인 사건을 예를 들고 있다. 임해수 심리 상담사는 TV 프로그램에서 한 인물에 대해 냉정하지만 객관적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그 인물은 자살을 하고 자살의 원인으로 임해수는 비난을 받는다. 정말 임해수의 잘못인가. 그 말 한마디에 그는 자살을 한 것일까? 말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임해수는 또다시 말을 하려고 애를 쓴다. 그녀는 편지를 쓴다. 그 사건에 책임이 있는 사람, 나를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읽어보아도 결코 나의 마음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편지를 찢는다. 산책길에서 만난 길고양이가 안쓰러워 다가가지만 쉽지 않다. 사람에게 다친 고양이는 마음을 열지 않고 경계한다. 그녀는 고양이를 통해 의사소통의 방법을 배운다. 때로는 포기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동물과도 말을 한다.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 의미와 행위를 부정하기도 한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도구인 말이 없어도 충분히 교감할 수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도와주려는데 도망가면 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본다. 상대방이 나의 마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잠시 멈추어야 한다. 그녀는 언어가 생략된 고양이와의 교감으로 안도감을 느낀다. 말은 때론 민주적이고 평등하다. 나이와 상관없고, 지식의 차이와도 전혀 상관없고 심지어 동물과도 통할 수 있는 말은 착하기도 하다.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


이제는 청자의 입장에서 언어의 속성을 살펴보아야겠다. 둘로 갈라진 관계인 청자 또한 화자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 닿은 말 그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오해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바로 감정이 떠오른다. 불쾌하군, 나를 무시하는 말이군, 그리고 옆의 청자에게도 묻는다, 그렇게 느꼈는지. 옆의 청자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순간 말은 구름처럼 모이고 떠돌다가 화자에게 비를 내린다. 천둥, 번개도 친다. 임해수는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고 대본대로 읽었을 뿐인데 내가 왜 청자, 대중, 심지어 자살한 사람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수의 청자는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며 당연한 권리인 듯 신처럼 행동한다. 아무도 임해수의 입장과 임해수의 말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남편과 친구조차도. 임해수 상담사처럼 유능한 사람이 한순간 몰락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매스컴의 힘이 무섭다고 느꼈는데 사실 그 매스컴을 바라보는 대중의 잔인함과 낯 뜨거운 열기의 민낯을 보게 된다. 아무리 잘못이 크다고 해도 다수의 횡포는 그 잘못만큼 괴이하고 섬뜩해 보인다. 한 사람의 인생이 무너져도 상관없다. 죄의 무게가 크기 때문이다. 그 죄는 정말 그만큼의 무게인가? 누가 판단하는 것인가? 청자가 제대로 된 경청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우리는 말에게 잘 속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질투도 하며 변덕쟁이  말은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돌연 사라진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고양이와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냥 싫으니까, 그냥 기분 나쁘니까 괴롭힌다. 처음부터 이유가 있지도 않았다.


다행히 임해수는 자존심을 지키는 고양이와 어린아이를 통해 용기를 얻는다. 그들이 보여준 자존심은 외롭지만 고결했다. 단단한 말은 나에게 있다. 나에게 진실한 말은 상대방에게도 진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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