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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Jan 04. 2024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를 읽고

"나"는 세 번째 남편과 살고 있다. 서울 갈현동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친정이 가까운 상계동, 시집이 가까운 수유동, 남편의 주머니 사정과 맞는 화곡동에 적당히 눈치껏 집을 보고 다니고 있다. 피난길에 종교처럼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했던 남대문도 이제는 새로운 서울 질서에 소외됨을 느낀다. 서울의 희번드르르한 치장 뒤에 숨은 뒤죽박죽을 느낀다. 꼭 뭣에 홀린 듯 분주 끝에 오는 절망적인 우두망찰을 느낀다. 고등학교 동창 희숙과 영미를 만나고 서로의 상태를 감정한다. 친구들은 벌써 "나"의 세 번째 결혼 소식을 들었지만 모르는 척 질문을 한다. "나"는 학창 시절처럼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피난길에 머문 동네에 미군 부대가 주둔을 했고 집안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어머니는 "나"에게 양공주가 되었음 한다. 나는 누구의 희생이 되고 싶지 않아 시골에서 부자라고 알려진 남자의 후취로 시집을 간다. 첫 번째 신랑은 무식하고 교만했고 "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 이혼을 했다. 생전 처음으로 어떤 선택을 했다. 둘째 남편은 지방 대학 강사인데 비겁한 위선자, 속물이었다. 두 번째 이혼은 쉬웠다. 세 번째 남편은 소문난 장사꾼이었다. 그는 동창 중 잘 사는 사람 인맥을 만들라며 "나"에게 동창 모임을 나갈 것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경희는 잘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다니는 일본 어학원도 남편 성화에 같이 다니게 되었다. 어느 날 일본 관광객들을 향해 안내원이 말한다. 소매치기를 조심하세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심한 통증을 감수한 후 나는 자랑을 느꼈다. 각종 학원들이 즐비한 이곳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깃발을 휘날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부끄러움은 자기 안에 일어나는 스스로의 자각 감정이다. 타인에 의해 느끼는 수치심과는 다른 것이다. 부끄러운 상황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에 선악과를 따먹은 남녀는 서로의 알몸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숨는다. 신은 묻는다. 왜 숨었는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은 중요한데 신은 왜 우리에게 악을 알려주려 하지 않았을까. 성경에서는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신의 뜻을 벗어나 자기 스스로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부끄러움을 양심이라 해석한다. 철학자, 종교인들이 말하는 절대선인 양심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그 기준을 과학으로, 경제로, 예술로, 학문으로 나눌 때 단절과 갈등이 생긴다. 예를 들어 약한 사람을 도우고 싶어도 나의 형편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그가 정말 가난한지 의심하게 되고, 심지어 가난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약한 사람을 돕고 싶다는 순수한 감정, 양심에 그저 반응을 하면 되는 것이다. 나의 부끄러움은 나만이 안다. 모든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행동을 한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도 나만은 안다. 그래서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외면하려고 해도 어느 순간 얼굴이 스스로 붉게 변하게 만드는 부끄러움에 도망가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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