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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Jan 12. 2024

"당신은 나를 바닥까지 휘젓고"를 읽고

피나  바우쉬

알마 출판사의 <활자에 잠긴 시> 에는 프리다 칼로 화가, 옥타비아 버틀러 소설가. 훈데르트바서 건축가 등 다양한 예술가에 대한 글이 있다. 나는 요즘 행복하게 예술에 푹 빠져 있다. 네 번째 책은 무용가 피나 바우쉬에 대한 시인의 이야기이다.


영화 <피나>를 보고 감동을 받은 시인은 그녀의 작품마다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가장 어려운 장르 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나도 안희연 시인처럼 몸치에 가깝고 마음은 굴뚝같으나 학교 졸업 후 춤을 춘 적이 없다. 몸을 움직이는 요가, 운동과 무용은 엄연히 다르다. 운동의 목적은 몸을 움직여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고 무용은 몸으로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감정을 글로 담기 어려워 글의 한계, 나 자신의 어휘 한계를 느낀다. 그러나 글보다 그림이, 그림보다 무용이 더 담기 어려운 것 같다. 이때까지 징징거림이 무안할 정도이다. 최근 나는 수화를 배우면서 작은 무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하는 수화인 줄 알았는데 얼굴 표정이 엄청 중요하다. "궁금하다"라고 손으로 표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얼굴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 수화를 배우는 수강생들은 얼굴 표정이 가장 어렵다고 호소했다. 그만큼 우리는 몸도, 얼굴도 경직된 상태인가 보다. 나는 더 수화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용 배우기가 지금의 나에겐 버겁다면 수화라는 작은 무용으로 시작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피나>를 볼 수 없기에 유튜브 동영상으로 그녀의 작품을 찾아보았다. 신기하게도 핑크색 카네이션이 가득한 무대에 한 남자가 수화로 노래에 맞춰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정말 수화인지 알 수는 없지만 피나도 나처럼 수화가 무용처럼 느껴진 것일까 라는 생각에 닿자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카페 뮐러>는 굉장히 실험적이다. 의자가 쭉 놓여있는 카페에서 무용수들은 눈을 감고 움직인다. 의자에 부딪칠까 걱정되는 사람이 바삐 의자를 치운다. 여기저기 같은 행위가 반복된다. 눈을 감으면 남이 신경 쓰이지 않을 것이다. 눈을 감고 걸어가는 사람은 무서울까, 당당할까. 옷을 벗고 엎드려 있는 사람. 서로를 껴안은 채 있는 커플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동작을 바꾸는 사람이 보인다. 우리는 혼자일 때도, 둘일 때도, 원하지 않는 타자가 낄 때도 있는 인생을 살고 있다. 그리고 내가 보이지 않는 방황을 할 때 의자를 내가 모르게 치워주는 사람이 있는 인생도 살고 있다.


<full moon>은 달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양과 서양이 느끼는 달은 다르다. 서양의 문화는 보름달을 불길함, 공포의 상징으로 여긴다. 아쉬탕가 요가에서는 달의 중력에 지구가 영향을 받듯 물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도 불안정한 상태이기에 보름달일 때 수련을 금한다. 피나도 불안정한 인간을 표현한다. 광기찬 사람들이 물 위에서 물을 퍼 서로에게, 바위에게 뿌리고 물에 드러눕기도 하고 팔짝팔짝 뛰기도 한다.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나의 달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광기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기억에 남는 <봄의 제전>이다. 계절의 여왕 봄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봄과 가을 중 어느 계절을 더 좋아하는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봄은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고 가을은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 있기에 좋아하는 감정이 비슷했다. 그러나 요즘은 가을이 추워 왠지 쓸쓸한 마음에 내 생일도 있는 봄이 더 좋다. 방학, 휴가가 있는 여름도 가깝고 봄이 싫을 이유는 없다. 봄이 무섭고 어둡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피나는 생명의 "탄생"이라는 고귀한 영역에 포함되어 있는 죽음과 희생, 소멸이라는 이미지를 알려준다. 한 여인이 붉은 천을 가지고 쓰러져 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아름다운 동작으로 호기심과 죽음의 애도를 표현하는 것 같다. 그리고 붉은 천을 가진 여인이 일어난다. 붉은 천은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진다. 붉은 천. 나는 죽음이라 생각한다. 나의 어머니는 아름다운 봄에 돌아가셨다. 내가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죽지 않은 모든 것들의 힘이었다. 죽음 바로 옆에는 생명이 있다. 사람. 동물, 꽃, 바람, 물, 공기, 음악, 예술, 글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나는 붉은 천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엄마의 죽음도 나의 죽음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무용수들은 군무 같은 춤을 춘다. 봄의 생명은 똑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봄에는 생명이 피어난다는 명제처럼 변하지 않는 진리는 좀 무섭다. 똑같이 표정 짓고 똑같이 움직이며 생명의 힘을 보여준다. 나는 아이돌의 군무 같은 춤을 좋아하지 않는다. 똑같은 동작에 감탄이 나오는 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였다. 얼마나 연습을 했을까, 얼마나 긴장을 했을까, 그들은 춤을 추는 것인가 올림픽을 하는 것인가 안타까웠다. 멋진 무대를 모니터 하며 실수를 찾아내는 것이 예술일까. 그런 군무 같은 춤을 봄이라 표현한 피나의 감정을 통해 나는 봄이 하염없이 잔인한 계절임을 깨달았다.


어렵게 느꼈던 무용이라는 예술의 영역을 해석하고 감상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기회가 되면 꼭 <피나> 영화를 보고 싶다. 그리고 지금 당장 연극이든 전시회든 어떤 예술이든 보고 싶다. 예술의 힘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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