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 연구자이자 한겨레신문 오피니언에서 글을 쓰고 있는 정희진 씨의 강의를 최근에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병원에 지인이 입원을 해서 병문안을 간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본인에게 자꾸 마시고 난 종이컵을 주더라는 것이다. 이유는 자신을 병원에서 일하는 환경미화원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현재 외모가 뚱뚱하고 옷을 갖춰 입지 않은 중년 여성들은 택시를 잡기도 힘든 상황에서 여자가 개인일 수 없다는 강의를 이어나갔다.
여기서 나는 의문이 들었다. 어떤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것인가? 택시를 잡지 못한다는 것은 경제적 지불 능력이 없다고 상대방이 판단하여 승차를 거부당한 것이다. 그럼 외모가 바로 경제적 능력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번 쯤은 외모로 차별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깨끗하고 날씬한 외모는 성실하고 능력이 뛰어나고 착할 것이라는 이미지를 만든다. 그래서 면접을 통과하기 위해 다이어트는 물론이고 성형 수술까지 받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바슐라르가 말한 형태적 이미지와 감각적 이미지는 원시적인 형태만 보고 있는 것이다. 즉각적이고 즉흥적이고 시각적 이미지에 의존하는 이 이미지는 주체의 자아 성찰 기능을 정지시키고 주관적 반응을 성급한 객관화로 만든다고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여성이 더 피해를 많이 본다고 생각하며 그 원인은 문화 (속담, 이야기, 책, 영화, 드라마)속에서 만든 여러 이미지가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바슐라르가 말한 물질적 이미지, 정신적 이미지는 대상의 물질성에 주목하여 만들어지는 정신적 이미지이며 대상과 의식간의 관계인 이미지로 본질에 충실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공감하는 보편성을 가지는 동시에 상상하는 주체의 역할이 강조된다. 여자를 인간이라는 대상으로 본다면 문화 컴플렉스라고 말할 수 있는 편견에서 벗어나 대상을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하여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의 힘은 애정과 존중에 있다고 한 수잔 손택의 말이 생각이 난다. 또한 여성 본인도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남에게 보여주는 기준으로 할 것인지, 나를 평가하는 타인에게 맡길 것인지, 스스로 주체가 되어 나를 표현할 것인지 판단해야 할 것이다. 내가 사랑하고 경험하고 상상하는 모든 것은 나의 실존이다. 나의 실존은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의식하고 있는 세상과 만들어 가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자발적인 상상력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기보다는 외부의 인공적인 이미지들을 받아들이는 게 익숙하다고 한다. 개인의 실존은 개인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획일성이 짙은 자본주의 상황에서 각각의 개인의 실존과 자유가 만나 다 함께 행복한 실존이 되기 위해서는 비판적 의식을 갖춘 살아있는 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