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려도 괜찮아
아이들이 어렸을 때 백 번도 넘게 읽어준 책이다. 특히 둘째가 좋아했다. 까르르 넘어가며 또 읽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난다. 왜 그렇게 좋아한 것일까. 그림책 모임에서 나는 그 점에 집중하며 읽었다. 조지 안에는 다른 동물들이 들어있다. 그래서 엄마가 짖어보라고 할 때 조지는 다양한 동물 소리를 낸다. 엄마는 다급하게 의사를 찾아가고 의사는 조지 입에 손을 넣어 동물들을 하나씩 꺼낸다. 우리 안의 다양한 모습이 있고 그것을 형상화한 그림책이라고 우리는 쉽게 결론을 내렸다. 나는 아이들이 웃는 포인트가 다른 곳에 있다고 본다. 아이들은 일부러 그런 것이다. 멍멍, 잘 짖을 수 있으면서 엄마를, 어른을 놀리고 싶어서 다르게 짖은 것이다. 그리고 다 꺼냈다고 안심하는 엄마에게 보란 듯이 또 다른 소리를 낸다. 똑바로 앉으라고 명령을 받고 똑바로 앉고 싶은 아이는 없다. 일부러 더 말을 안 듣는다. 그런데 엄마의 표정이 가관이다. 안절부절 난리가 났다. 조지는 느긋하다. 이 포인트가 아이가 웃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은 분명 어른들을 골탕 먹이고 있다. 난 정상인데 저 안절부절 난리 치는 꼴 좀 봐, 하하하. 우리 딸은 이 간단한 문장, 짖어봐 조지야, 아니야 개는 멍멍, 고양이는 야옹 이 말을 나에게 수도 없이 시켰다. 나를 골탕 먹인 것이다. 웃음이 난다. 아이들의 발칙한 본능, 솔직한 반항심에.
우리는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약 나의 아이가 언어 발달이 느리다면, 조지 엄마처럼 병원에 갈 것인지 누군가 물었다. 아, 발달 장애... 어려운 문제이다. 쉽게 간다고, 또는 쉽게 안 간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적인 마음은 병원에 가지 않고 기다리는 모습이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를 조바심 나게 만들고 심지어 병원에 가지 않으면 나쁜 엄마 소리를 듣게 만든다. 때를 놓치면 큰 일이라고 주변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런데 아이는 일부러 그럴 수도 있고 아주 정상일 수도 있다. (정상의 기준은 무엇인가) 기다리는 것이 맞는 것인지, 서둘러 치료를 해야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양육이 이 점에서 어렵다고 생각한다. 부모를 짓누르는 책임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잘 키워야 한다, 아픈 곳 하나 없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누구에게도 손가락질당하지 않게, 학교 진도를 잘 맞출 수 있게 미리 선행을 하면서, 잘 키워야 한다.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다 부모 잘못이 된다. 이 책임감에서 벗어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정상일까. 최근에 읽은 아주 솔직한 에세이처럼 좋은 엄마와 미친년 사이를 오고 가는 우리의 마음은 정상일까. 조지 엄마의 표정은 우리의 모습 같다. 부모들이 스스로를 좀 놓아주면 좋을 것 같다. 좀 느리게 가도 괜찮다고 믿어주는, 안달하지 않는 가족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