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좀머 씨 이야기>를 읽고

좀머 씨는 나이다.

by 하루달

좀머 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어 다닌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짚으며 서둘러 길을 떠난다. 아무도 그가 어디를 가는지, 무슨 목적으로 걷는지를 모른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더워도 추워도 좀머 씨는 종일 걷는다.


이야기는 '나'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전개된다. 나는 아버지와 경마장에서 돌아오는 날 비가 억수로 내릴 때 좀머 씨를 만난다. 또 원하던 카롤리나와 데이트를 하지 못하고 돌아올 때 좀머 씨를 본다. 가장 큰 사건, 피아노 선생님에게 수치심을 느끼고 나무에서 뛰어내리려고 할 때도 좀머 씨를 본다. 나에게 일어난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기억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좀머 씨를 봤기 때문에 이 일화를 기억하는 것일까. 나와 좀머 씨의 관계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좀머 씨가 전쟁 후 외상 스트레스로 집안에 있을 수 없는 밀폐 공포증으로 밖으로 돌아다닌다고 생각을 한다. 나는 자신이 나무 타기를 그냥 좋아하는 것처럼 좀머 씨가 그냥 걷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좀머 씨는 단 한마디만 한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좀머 씨를 괴롭힌 것은 관심과 간섭이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차에 태워주려는 호의도 싫어한다. 나는 좀머 씨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기억한다. 측은하게 생각한다.


"그러니"라는 말이 거슬린다. 앞에 무슨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고 이어지는 말이 "그러니"이다. 아버지는 그러다 죽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좀머 씨는 화를 내며 그러니 그냥 놔두라고 한다. 좀머 씨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죽을 수 있으니 그냥 놔두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죽는 것도 자신의 선택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이야기에서 사실 좀머 씨의 사건은 별로 없다. 좀머 씨는 걷기만 할 뿐이다. 모두 '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좀머 씨는 곧 '나'이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관심이 간다는 것은 곧 나의 무언가와 비슷하거나 끌리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나'의 성장이 중심을 이룬다. 어린 나는 외롭고 존중받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나무 위에 올라간다. 그곳은 위로를 주는 곳이며 간섭과 꾸중으로부터 해방되는 곳이었다. 그러다 더 이상 세상의 모욕으로부터 견딜 수가 없게 되자 자살을 결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자살을 하지 않는다. 좀머 씨를 보았기 때문이다.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처절하게 사는 그를 보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좀머 씨는 자살을 한다. 나는 좀머 씨가 강으로 빠지는 모습을 보고 막지 않는다. 당혹스럽거나 두려워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린 시절의 고통, 상처가 사라지는 장면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도 세상이 너무나 모욕적이고 적대적이라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세상과 이별하려고 하는 순간 자유로운 해방감을 느꼈다. 나의 약한 모습, 어리석은 모습을 내가 놓아줄 때 나는 성장한다. 나를 괴롭히던 것, 규율, 통제, 무시 때문에 나는 자살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는 덜 상처를 받는다. 그만큼 키도 자랐고 잘하는 것도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을 낭비한 적도, 시간이 가도록 내버려 둔 적도 없다. 그저 시간은 흐를 뿐이었다. 그 사이 우리는 자랐다. 어른이 되어도 자란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자란 것이다. 무슨 일을 했든 그 시간 안에 우리는 살아있었다. 살기 위해 걸었고, 먹었고, 사랑했고, 생각했고, 그래서 우리는 살 수 있었다. 끊임없이 걷는 좀머 씨는 시간이자 우리의 모습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짖어봐 조지야”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