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졌다" 단어의 힘
고메라섬 부족은 휘파람으로 된 말을 가지고 있다. 높낮이와 길이가 다른 휘파람 소리는 거대한 협곡 때문에 만들어졌다.
아홉 살 때 나는 아버지가 사준 책에서 네시를 보았다. 네시는 멸종된 플레시오사우루스를 닮았다. 오랫동안 네시는 잊힐 만하면 나타났고 기억할 만하면 사라졌다.
나의 아버지도 사라졌다. 놀이공원에서 <세계의 불가사의> 책을 끝까지 읽는 내내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냥 사라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나는 해양대학을 나와 수족관 관리 요원이 되었다. 작은 우연들과 스스로 만들어낸 의미 때문이다. 나는 밥벌이에 대한 자긍심이 있다. 정당한 노동 때문에 갖게 되는 삶의 기준과 편견은 어른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사람들은 수족관의 물고기가 자신을 봐주기 바라는 마음에 유리벽을 두드린다. 물고기들이 관심을 주지 않아서 불안하기 때문이다. 5월은 기념일이 많아 무척 바쁜 나날이다. 수족관에서 있는 나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도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물고기에게도, 거북에게도, 상어에게도 웃고 있었다. 나는 수족관에서 아버지를 향해 유리벽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또 사라졌다. 수면 위로 올라오자마자 나는 쇳소리 같은 휘파람이 나왔다. 다시 수조 안에 얼굴을 박았다. 물고기들이 일제히 아빠, 아빠, 아빠 하고 있었다.
소설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핍진성이다. 개연성보다 더 구체적으로 진실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정도가 핍진성이다. 왜 아버지는 나를 두고 사라진 것인가. 물고기를 보고 웃는 아버지는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데 나의 말대로 아버지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인가. 모호한 상황을 핍진성을 높이기 위해 작가는 발단부터 네시 이야기로 시작한다. 네시는 정말 실존한 것인가, 상상인가, 조작인가. 직접 봤다는 사람도 있는데 다시 사라졌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아버지가 사라진 이유도 명확하지 않지만 네시 이야기 때문인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은 정말 진실인가. 자식을 버렸다는 사람들, 정말 자식을 버린 것인가, 어쩔 수 없이 잃어버린 것인가. 본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네시는 아버지를 의미한다. 나가 해양대학을 가고 수족관 관리 요원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백두산에 네시가 나타났다는 가짜 뉴스를 보고 나는 자신에게 사랑의 인사를 하기 위해 온 것이라 믿는다. 마침내 수족관 안에서 나는 아버지를 만났다. 물론 아버지는 수족과 유리 밖에 서 있었지만. 그렇게 다시 나타났다. 나는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사라졌다고 함으로써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 남들은 나에게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스스로 한 번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 적도, 그렇게 행동한 적도 없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다. 대부분 현실을 탓하고 남을 탓하다가 결국 자기학대로 이어지는데 말이다. 눈앞에서 사라진 아버지처럼 아버지는 그때도 사라진 것이다.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고 믿는다. 나가 아버지를 찾지 않는 이유도 아버지가 자신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졌다”라는 단어가 주는 상황의 역설에 놀랄 뿐이다. 작가는 이렇게 단어 하나를 신중하게 고르는 것 같다.
왜 제목은 사랑의 인사인가. 작가는 또 발단에 고메라섬 부족의 언어를 이야기한다. 사랑의 인사는 뜻 없이 높이와 길이가 있는 휘파람, 바람일까. 바람은 우리 귀에 언제나 닿아 있다. 인사는 만날 때도 하고 헤어질 때도 한다. 환하게 웃다가 헤어질 때 흘리는 눈물인가. 사랑의 속성도 비슷하다.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갑자기 나타나는 미스터리인가. 심해처럼 알 수 없는 것인가. 도대체 사랑의 인사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런데 소설 속 누군가가 사랑의 인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부분 물고기들이 들려주는 아버지 이름 자체가 사랑의 인사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