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빌라는 낮은 언덕을 깎아 만든 절벽 위에 지어졌다. 세입자에게는 늘 이런 절박한 상황이 주어진다. 방을 빼주기로 한 날짜는 다가오고 조건에 맞는 집은 없고. 그래서 급하게 장미빌라에 이사를 왔다. 이사를 오고 알게 되었다. 장미빌라 뒤편 절벽 아래 A구역이 재개발 공사에 들어간다는 것을. 저렴한 가격에 전보다 조금 넓은 평수로 이사를 와서 행복했는데 이제는 지금보다 조금 조용한 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게다가 절벽 아래에서 벌레들이 기어 온다. 불쑥 화장실에서, 수납장에서 벌레들을 발견한다. 전 세입자가 더럽게 쓴 집을 청소하는 데 며칠이 걸렸다. 그날 아기가 생긴 것 같다. 두 번이나 아기를 포기한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출산을 결심한다. 그녀는 빈곤의 냄새가 풍기는 바깥 세계로부터 우리 집을 지키는 의식으로 늘 열심히 청소를 한다. 그런데도 점점 다양한 종류의 벌레가 출현했다.
남편은 제과업에서 일한다. 중국산 재료를 쓴다고, 젤리를 먹다 기도가 막혀 아이가 죽었다고, 과자에서 구더기가 나왔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회사는 점점 매출이 좋지 않다. 임신으로 살이 찌자 결혼반지를 빼 수납장 위 상자에 넣어두었다. 회사에 비상이 걸려 남편은 야근이다. 커다란 벌레가 방충망을 뚫고 기어올라오고 있다. 벌레를 죽이는 과정에서 반지가 들어있는 상자도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학비도 생활비도 모자란 시절 푼돈을 모은 돈으로 사준 반지이기에 그녀는 절벽 아래로 용기를 내어 내려간다. 그곳에서 엄청난 양의 벌레들을 보고 양수가 터진다.
벌레는 징그럽다. 작은데 왜 징그럽고 무서운 생각이 들까. 모습을 보이지 않고 숨어버려서 또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떼 지어 나타나 나의 몸에 기어 다닐 것 같은 생각이 소름 끼치게 만든다. 사실 벌레는 약한 존재이다. 작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무기 없이 손바닥, 발바닥으로도 죽일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둘러 살충제를 찾는다. 꾹 눌러 죽이는 게 뭔가 께름칙하다. 벌레 같은 놈이란 욕도 있다. 벌레가 뭘 잘못했나. 작고 연약한 존재인데.
어쨌든 벌레는 일반적으로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소설에서 벌레가 우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한 사람들끼리 저 사람들은 가난하겠지, 가난의 냄새가 난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끼리 있는 주거 지역을 우범 지대라고 쉽게 말하며 꺼린다. 말하는 사람도 가난한데 말이다. 벌레들을 없애듯 사람들이 사는 주거 공간도 쉽게 허물어진다. 장미빌라도 A구역도 모두 벌레들이 사는 곳이다. 조금 넓어진 공간에서 팔다리를 쭉 펴며 이런 공간이 어색하다고 말한다. 밖에서 들어오는 먼지를 차단하기 위해 부지런히 청소를 하지만 늘 먼지가 쌓인다. 외부에서 들리는 공사 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나의 몸, 정신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이런 주거 공간은 애초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공간, 내가 인간인지 벌레인지 헷갈리게 하는 공간. 자본주의에 의해 계급을 나누듯 공간의 계급을 나누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이다. 이 가격이면 맞는다는 생각은 주어진 환경을 바꾸려는 생각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오히려 가난한 자신을 탓하게 만든다. 남편은 조금 미안해하며 매번 내가 더 열심히 일할게를 다짐한다. 야근을 하는 것도 모자라 어떻게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가. 인간 존엄성을 상실한 채 자기들끼리 뭉쳐 나무 밑에 숨어있는 벌레들의 모습은 우리의 자화상이다. 몇 십 년, 또는 몇 백 년을 산 것 같은 나무가 쓰러졌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계속 집을 짓고 개발하는가. 나무, 자연을 없애도 될 만큼의 가치가 자본주의에서는 무엇인가. 정말 필요하고 소중한 것은 없애면서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김애란 작가는 벌레로 가난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방충망을 뚫고 올라오려는 벌레, 마치 <꽃들에게 희망을> 책의 한 장면 같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도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