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의 관계
김애란 작가를 모르고 읽었던 시절, 소설을 읽고 작가가 누군지 기억하지 않았던 시절,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던 소설이다. 제목도 생각이 나지 않아 다단계를 소재로 다룬 소설이라고 검색창에 입력을 하기도 했다. <서른>은 최고의 소설이다.
모든 소설을 묶은 책 전체의 제목은 <비행운>이다. <하루의 축>에서 비행운이 나온다.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구름, 비행운이다. 그러나 하늘을 날고 싶었던, 꿈이 있었던 모든 인물들에게는 행운이 따르지 않는다. 非행운이다. <서른>의 나는 말한다. 누군가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고. 그러나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으로 남을 이용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아무 이유 없이 따르던 학원 제자, 혜미가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한다. 소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우리들의 모습을 고백한다.
사임당독서실에서 만난 언니에게 나는 편지를 쓴다. 언니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고 나는 재수생이었다. 서로 어렵고 힘든 시절, 언니는 늘 밥 먹었냐고 물어봐주고 시험 잘 보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십 년이 흘렀다. 언니는 아기 엄마가 되었고 나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한다.
나는 불문학을 전공하며 휴학과 복학을 번갈아 하며 7년 만에 졸업을 한다. 아르바이트로 보습학원에서 수업을 하다가 자신을 따르는 귀여운 제자도 만났고 원장에게 간식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모습에 반해 사귄 남자친구도 만났다. 취직이 잘 안 되고 집안의 형편도 더 안 좋아진 상황에서 헤어진 남자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열심히 논문을 쓰다가 신용불량자가 되었던 그는 이제 돈을 잘 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한 달에 3백만 원, 많게는 천만 원까지도 벌 수 있다는, 그러나 먼저 8백만 원어치 물건을 사야 하는 이상한 회사에 들어간다. 다단계가 아닌 선진국형 신개념 네트워크 마케팅이라는 곳은 다세대주택에서 남녀가 같이 먹고 자고 싸고 하면서 두셋씩 짝을 지어 생활한다. 휴대전화를 압수당하고 아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털어놔야 한다. 나이, 학력뿐 아니라 콤플렉스, 건강상태, 타지생활 유무까지. 믿기 힘든 일이 서울 한복판에서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들에게서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짝사랑했던 선배, 소꿉친구, 같이 공부했던 동기들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물건을 팔았다. 1년 치 합숙비를 미리 낸 뒤라 발을 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내가 산 5백만 원어치 양파즙을 먹고 3백만 원어치 비누와 칫솔, 양말을 써가며 물건을 팔았다.
더 이상 연락할 사람이 없어져 몇 달간 돈을 만져보지 못하던 때 나를 사랑하던 학원 제자가 문자를 보냈다. 회사는 바로 지시를 내렸고 나는 남자친구가 나를 끌어들인 것처럼 그 아이를 집어넣고 회사에서 나왔다. 이것이 관례였다. 그 아이, 해맑았던 혜미는 엄청난 빚에 시달리고 파탄난 인간관계를 견디다 못해 자살 시도를 하다가 식물인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