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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Nov 05. 2024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를 읽고

상실감

사촌언니가 한 달간 집을 비운다고 나에게 와서 있으라 한다. 나는 스코틀랜드에 도착해 청명한 하늘을 보며 남의 집에서 떼다 붙인 커튼 같다고 생각한다. 숙소에서 나는 긴 잠을 잤다.

나는 돌아가신 엄마가 준 요리수첩을 보며 열무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그날은 남편이 금연을 시작한 날이기도 했다. 남편이 학교 체험 학습장에서 제자를 구하려다 사망했다는 전화가 왔다. 장례식에 제자의 부모는 오지 않았다. 권지용은 부모 없이 누나와만 살고 있었고 권지은 누나는 몸에 마비가 와서 오지 못했다.

나는 스코틀랜드에서 관광 명서를 찾지 않고 신문을 보지 않고 사진을 찍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도랑 위에 쌀뜨물 버리듯 그냥 흘러 보냈다. 몸에는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장미색 비강진이 하얗게 자라고 있었다. 나는 남편이 했던 것처럼 핸드폰 시리에게 쓸데없는 것들을 물어본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시간은 창처럼 세로로 박혀 내 몸을 뚫고 지나갔다. 

에든버러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현석이를 연락해 만났다. 현석이는 도경이와 헤어졌냐고 묻는다. 그리고 몸에 핀 장미색 비강진을 보고 놀란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권지은 학생이 보낸 편지를 읽는다. 지은이는 고맙다고 했다. 동생이 마지막으로 잡은 것이 차가운 물이 아니라 선생님의 손이었다고. 그리고 선생님이 동생의 손을 잡아주신 마음에 대해 평생 궁금해하면서 살겠다고. 






죽음 앞에 살아있는 자는 고통스럽다. 평범한 일상이 사라진다. 시간은 버티는 것으로 뒤바뀐다.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어도 시간은 가지 않는다.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몸을 관통한 화살로 표현했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이 떠오른다. 혼자 있는 공간에서 들리는 사소한 일상 소리는 낯설고 크게 느껴진다. 마치 돌아오는 메아리 같다. 텅 빈 집에 텅 빈 소리만이 가득하다. 마음의 아픔을 몸에 돋는 피부병과 오른쪽 마비로 표현했다. 현대의학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질병들은 모두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말을 듣는다. 상실감을 어떻게 의학이 진단할 수 있겠는가.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나는 서운하다. 나를 생각했다면 제자를 구하러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러나 남편은 죽음을 향해 뛰어든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해 뛰어든 것이라고 마음이 바꾼다. 이기적이지만 고맙다는 지은이의 편지를 읽고.

영화 <어디로 가고 싶은가요>에서는 권지용과 권지은, 그리고 누나를 좋아하는 지용이의 친구가 도와주는 이야기가 더 있다. 아픔을 극복하는 것은 결국 시간과 사람들의 따뜻한 위로와 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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