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의 "죽은 자의 집 청소"

에세이

by 하루달







죽고 난 뒤의 팬티- 오규원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시인이기 때문에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할 수 있는 것일까? 어렵고 힘든 일을 하는 시인의 모습보다는 나는 죽은 자들에게 더 마음이 갔다. 오규원의 시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남긴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숨기고 싶은 것을 들킨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만 같았다. 자살을 한 사람의 남은 가족들이 겪을 고통을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간을 두고 가족들에게 정리할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나, 업체에 맡겨 집을 정리하는 것은 마지막 남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근무해서 많은 죽음을 바라본 지인이 말한다. 유가족에게 절대로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나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남편은 엄마 집에 혼자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며느리, 사위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을 딸인 내가 처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오빠가 서둘러 정리하는 모습, 무조건 버리는 모습도 싫었다. 나는 버리고 싶지 않았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무조건 나의 집으로 가지고 왔다. 음식은 쓰레기가 되었지만 그래도 나의 싱크대에 버리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사진, 편지를 식구들 별로 나누는 작업이 한달이나 걸렸다. 그래도 눈물 흘리는 시간이 소중했다. 용달차에 엄마의 의자, 서랍장, 액자를 실어 가져왔다. 갑작스런 죽음이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마음의 여유를 베풀어 준 시간이었다.


자살을 하거나 혼자 살다가 죽은 사람들의 가족은 얼마나 더 마음의 상처가 클까?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더더욱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클 것이고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뒷처리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결국 사회적인 문제이다. 그것을 개인에게 다 떠넘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시인이 정리를 하고 이렇게 글을 씀으로써 고인에게 정서적인 위로를 마지막으로 보냈다는 점에서 진심으로 감사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가족이나 이웃이, 지인이 고인을 떠나보내는 일을 하는 넉넉한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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