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7일 수비리
새벽 2시에 자꾸 눈이 떠진다. 한국 시간 6시인가 보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는 규모가 커서 순례자들이 많았다. 다들 들떴는지 좀 늦게 잔다. 나는 짐을 줄이기 위해 책을 가져오지 않고 사진 찍고 다운로드하였는데 외국인들은 밤늦게까지 종이책을 읽는다. 슬로 라이프를 사는 게 느껴진다. 나도 종이책이 그립다. 눈을 뜨면 한강 시를 읽는다. 그리고 한국 정치 뉴스를 보며 침대에서 뒹굴뒹굴한다. 잠이 오지 않는다. 6시에 일어나서 짐을 정리하고 또 반복적으로 발을 살핀다. 7시에 아침식사를 하는데 어제 커뮤니티 식사를 한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 한국은 이렇게 오래 여행하는 게 쉽지 않은데 너희들은 어때 물어보니 독일은 6주 휴가를 쓸 수 있다고 한다. 부럽다. 학생 같아 보이는 네덜란드인은 과학자라고 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을 읽어봤냐고 물어보니 너중에 꼭 읽겠다며 사진을 찍는다. 전 세계 베스트셀러는 아닌가 보다. 암튼 공통점이 생겼다. 식사 후 한국인 수정 씨와 같이 출발했다. 결혼하기 전 마지막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왔다고 한다. 혼자 여행을 즐기는 무척 독립적인 분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니 시간이 금방 갔다. 거기에다 어제보다 순탄한 길이고 비도 오지 않는 럭키한 날이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하고 이제는 각자 속도로 걷기로 했다. 수비리 가는 길은 내리막이 어렵다. 나는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조심스럽다. 나 혼자 나를 책임져야 하니 더욱 조심하게 된다. 남편은 2시간이라도 연락이 없으면 난리를 친다. 수정 씨랑 걷다 보니 카톡 하는 걸 깜빡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했다. 남편 혼자 있을 때 나도 아침 모닝 전화로 깨우기도 하고 반찬도 만들고 왔었다. 지금은 셋이 같이 있으니 나는 걱정을 안 한다. 딸이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처럼 집이 될까 봐 가족회의까지 열었다. 딸이 집에 있어 걱정이 없다.그렌데 나 혼자 있으니 남편은 걱정이 되나 보다. 입장이 바뀌었다. 수정 씨는 결혼을 해야 하나 고민스럽다고 한다. 둘이 같이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결혼생활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별 얘기 다 하게 된다. 단 하루 만에 몸이 적응을 했나, 아님 힘든 하루는 모든 걸 쉽게 만드나, 암튼 오늘은 어제보다 힘들지 않았다. 아, 또 행복하다
배가 고파 주변 카페에서 라떼와 크로와상을 먹었다. 시에스타 시간에 유일하게 문을 연 곳이다. 정말 문 연 곳이 없다며 꼭 먹거리를 챙기라는 조언이 많았는데 의외로 문을 연 곳이 있다. 순례자를 위한 배려 같다. 출발 시간은 모두 다르지만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난다. 인생과 같다. 누가 먼저 성취한 것 같아 보여도 결국 똑같은 패턴을 가게 된다. 그러므로 조바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제부터 자유시간이다. 반갑게 한국인 미영 씨를 만났다. 영국,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독일 삼성에서 일한다고 한다. 멋진 인재이다. 남편도 삼성에 근무한 적이 있다 하니 또 공통점을 발견해 폭풍 수다가 이어졌다. 프랑스인, 네덜란드인을 다시 만났다. 미영 씨가 같이 파스타를 해 먹자 한다. 여기는 오븐뿐인데 가능하냐니까 보여준다고 한다. 가까운 슈퍼에 가서 마카로니와 토마토소스, 양송이, 토마토를 사서 왔다. 뜨거운 물을 마카로니에 붓고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소금 간을 하고 다시 파스타소스와 양송이를 넣고 또 익혔다. 마지막 치즈도 넣으니 근사한 파스타가 되었다. 샐러드를 먹고 싶었는데 올리브유가 없어 그냥 토마토를 썰어 후추, 소금 간을 해서 먹었는데 너무 맛있다. 로망인 납작 복숭아가 보이지 않지만 그대도 만족이다. 계속 토마토를 사 먹어야겠다. 미영 씨가 영어를 잘하니까 대화를 주도한다. 신기하다. 어제보다는 조금 더 잘 들린다. 우리는 MBTI로 성격을 유추하는데 외국인은 별자리라고 한다. 세 명은 물고기자리, 두 명은 황소자리라 모두 놀랐다. 모두 3,4월이 생일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대화가 이어진다. 우리 셋이 요리를 해주었다며 자연스레 둘은 뒷정리를 한다. 설거지를 한다. 최근 성당에서 핫이슈가 설거지였다. 며느리를 보신 분들이 가족들이 식사를 한 후 자신들이 설거지를 한다며 속상하다고 한다. 잔소리를 하면 사이가 좋아지지 않을까 봐, 시대가 변한 것인가 보다 하면서 자신이 설거지를 한다고 한다. 참 어렵다. 그런데 여기는 그런 기싸움이 없다. 누군가는 식사를 차렸으니 누군가는 뒷정리를 하는 게 예의 아닐까. 초대를 받으면 감사 인사를 하는 것처럼. 대한민국 여자들이 시댁 트라우마? 가 있는 것은 맞다. 설거지를 안 하면 해결되는 것인가. 누군가는 이렇게 울고 있는데. 며느리이기도 하고 나중에는 나도 시어머니가 될 수도 있는데, 현명한 방법을 찾아야겠다.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내가 보인다.